"동창생 헌성이가 갔어"

2020.05.10 01:35

노기제 조회 수:6

20190827                               헌성이가 갔어

 

                                                                            노기제 (통관사)

   순간이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은. 비록 오랜 기간을 병상에서 투병하던 사람도 문병 가보니 이름표가 없어진 상황을 만나는 건 역시 몇 초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며칠 전에도 왔었는데.

   헌성이와 장서는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가난했던 유학시절 외로움을 공유하며 룸메이트로 서로를 의지했던 절친이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던 헌성이와는 달리 죽기 살기로 혼자 꾸려나가야 했던 장서. 자연스레 헌성이가 먼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세상천지 낯선 미국 땅에서 홀로 되어버린 장서의 유학생활은 겪어 본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 졸업하고 결혼하고 나름대로 성공해서 한 동안 같은 하늘 아래 미국에서 살면서도 서로 적조했던 날들. 급기야 헌성이는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귀향해서 현대 중공업에 터를 잡고 살았다.

   친구란 자주 만나지 못해도 친구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부양가족이 생겼으니 유학생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뿌리를 내린 친구의 온기는 변함이 없다. 가끔 오가는 동창들 입소문으로 소식을 접하기만 해도 곁에서 술 한 잔 나누듯 가깝게 느껴진다.

   훌쩍 달아난 삼십 년도 더 되는 세월을 뒷주머니에 꾸겨 넣고 한국 방문에 나선 장서가 헌성이를 찾는다. 이번엔 꼭 만나서 지난 시간들 꺼내 펼쳐 놓고, 같이 한바탕 떠들어 보리라. 첫 딸 인영이도 어른이 되었으니 시집을 보냈겠지. 손주가 생겨 할아버지 호칭으로 불리려나. 막상 만나려니 왜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장서의 가슴이 차오른다.

   “헌성이? 갔어. 벌써 사 년이나 된 걸

   투병시절, 직장에 사표내고 동창회 사무실에서 소일했었다며 전해주는 동창들의 전언에 망연자실 할 말을 잃은 장서.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와서 모임을 주선한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얼굴엔 멋쩍어 하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 뭐가 그리 계면쩍은지 날마다 주춤주춤 말 한마디 터트리지 못하는 사람. 불평불만 한 조각도 가슴에 없는 사람모양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모습. 온갖 것 다 참아내며 미소로 승화시켜 살아내려니 그 속이 얼마나 새카맣게 타 들어갔을까.

   내 기억에 찍혀진 헌성의 모습이다.

   동기들 중에 특별히 헌성이와 시간을 공유했던 네 쌍의 친구들이 뭉쳤다. 충격이 컸던 장서가 주선했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55. 유학이던 이민이던 미국 엘에이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존재를 익힌 시간이 40 여년이다. wife들끼리도, 차이나는 나이와 상관없이 남편들의 동창인 듯 스스럼없이 가까운 사이로 대한다.

   싸 하니 가슴 한 구석이 불편하다. 세상 마음 좋은 아저씨의 인상으로 오래 기억되는 헌성이를 추억하려 시작된, 남겨진 우리들의 모임이 훈훈하게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20190904 수 중앙일보 이 아침에 동창생 헌성이가 갔어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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