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도시락

2020.05.23 01:56

구연식 조회 수:3

아내의 도시락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도시락은 집을 떠나서 일하러 가거나 여행 또는 소풍 갈 때 휴대하기 쉽게 밥과 반찬을 곁들여 담은 것을 일컫는다. 특히 일의 성과를 내고 집밖에서 먹기 때문에 밥맛이 그리도 좋다. 퇴직 후 모처럼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자동차 창 가림막을 치고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니 그 옛날 할머니의 도시락 그리고 어머니의 도시락 생각이 났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 옆에 모두 다 뚜껑을 열어놓으니 굴핏한 참에 식욕이 돋았다.  

 

 

 

 조선 시대의 도시락은 지금처럼 쇠붙이를 이용한 그릇 문화가 아니라 운반이 불편한 옹기문화(甕器文化)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운반이 가볍고 신선도(新鮮度)를 유지하려고 싸리나무로 둥글게 엮은 작은 고리짝을 도시락으로 사용했었다. 이렇게 도시락의 재질과 내용물은 그 시대의 그릇 문화 그리고 음식문화에 따라 변천이 다양했다. 옛날 선비들은 먼 길을 갈 때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갔는데, 그 괴나리봇짐 안에는 소형(小形)의 지필묵(紙筆墨) 그리고 책자를 반드시 휴대했으며, 도시락도 챙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괴나리봇짐 밖으로는 여벌로 삼은 짚신을 매달고 죽장(竹杖)에 삿갓을 쓰고 풍류천하를 떠났을 것이다.

 

 

 

  나의 유년기 때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 있다. 지금도 생생한 할아버지 도시락 이야기다아버지 형제분들은 모두 10남매이셨다. 12 식구의 식량 조달이 그 당시(1920년대)에는 끼니해결이 급선무였단다. 할머니는 어린 새끼들과 한 끼라도 늘여먹기 위해 할머니 자신은 굶다시피 하시며 잡곡을 섞어서 한 끼를 준비하셨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는 혼자서 배불리 잡수시고 나머지 새끼들 먹일 밥마저 주먹밥 도시락을 만드시더니 그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할머니는 너무 야속하고 미워서 속으로만 썩을 놈의 인간, 그것 처먹고 죽어버려라!하시고 온종일 울화통이 터져서 가슴앓이를 하셨단다. 그런데 뉘엿뉘엿 해질 무렵 할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쌀자루 하나를 메고 들어오시는 반전(反轉)의 모습을 보시고, 할머니는 표정 관리가 어색하셨단다. 그날 저녁 식구들은 어느 때보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온 쌀로 배불리 식사를 했단다. 조용한 시간에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자초지종을 물으니, 주먹밥 도시락을 지게에 매달고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 한 짐을 어깨가 찢어지게 지고 읍내 장에서 팔아 쌀을 팔아오셨단다. 60여 년 전의 할머니가 나한테 들려주신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지만, 가장(家長)으로서 책임을 다하신 할아버지 모습이 보고 싶다.

 

 

 

 나의 어린 시절(1960년대)에 아버지는 지금의 국토관리청에 출근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혈기왕성한 40대이시고 유난히 건장한 아버지의 체력을 유지하시도록 미군들이 야전 전투에서 식기(食器)로 사용하였던 군용 반합에 꾹꾹 눌러서 싸준 도시락을 자전거 짐받이에 꽁꽁 묶어 출근하셨다아버지의 월급날 환하게 웃으시며 돈을 세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오후 수업이 있어서 어머니가 알루미늄 도시락에 반식기 보리밥(보리와 쌀을 반반 섞어 지은 밥)을 주걱으로 쌀밥만 골라서 싸주셨다. 그래서 유일하게 쌀 섞인 밥을 먹을 수 있는 때가 나의 점심 도시락이었다. 늘 동생들은 나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였으며 어머니한테는 그게 불평거리였다. 나는 학교에서 도시락 귀퉁이에 밥을 조금 남겨서 집에 돌아와 동생들한테 주면서 불평을 해소했었다. 대학은 다른 지역에서 다녔는데 그 당시(70년대)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러 생계를 유지하는 도시 가구도 상당수가 있었다. 대학 시절의 도시락은 쌀밥에 푸짐한 반찬으로 흡족했으나 언제나 양이 차지 않아 저녁때는 꼭 자장면 한 그릇을 사 먹어야 잠을 잤었다.

 

 

 

 나의 결혼기념일 3주년쯤 되는 어느 해 61일이 일요일과 겹치게 되어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을 좀 더 뜻있게 보내려고 가장 뜻있는 결혼기념일을 보내기로 했다가장 가까운 곳에 가서 놀다 오기로 했다. 점심때 먹을 밥은 김밥을 둘둘 말아서 썰지도 않고 통째로 비닐에 싸고 콜라 한 병과 함께 준비한 것이 그날의 점심 도시락이다. 군산역에서 익산행 완행열차를 타고 다시 익산역에서 대전 가는 완행열차로 환승하여 논산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부여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우선 박물관을 구경하고 부소산(扶蘇山)으로 올라가다가 늦은 봄비를 만났다, 그리 많이 오는 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우산 없이 잠시만 서 있어도 옷을 촉촉이 적실 강수량이었다. 박물관 뒷길 부소산 중턱쯤 가다가 비를 만나서 비를 피할 수단은 어른 키 정도의 소나무들뿐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가장 잎사귀가 촘촘한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는데 좀처럼 쉽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아예 마음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시장기가 들었다. 우리는 소나무 아래서 썰지 않은 김밥을 꺼내어 한 입씩 베어 먹으니 이 세상 어느 김밥보다 맛이 있었다.

 

 

 

 교직에 임용되어서도 그 당시는 학교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각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지게 뒤에 매달았던 도시락, 자전거 짐받이에 매달았던 아버지의 도시락을 상기하게 되었다. 더구나 초임 때는 3학년을 맡아서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버티려면 하루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는 날이 허다했다. 혹 두 개를 못 싸가는 날이면 안식구가 오후에 학교 수위실에 저녁용 도시락을 놓고 가면 교무실에서 저녁 도시락을 먹던 때도 비일비재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의 도시락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퇴직 후에도 매주 화요일은 또 도시락을 지참하고 출근하는 날이다. 나의 어머니는 그 당시 92세가 되셨는데 요양병원에서 요양중이셨다. 그런데 매주 화요일은 요양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점심 드시는 것을 도와 드려야 했다. 전주에서 최소한 11시 이전에 출발해야 12시 이전에 익산의 요양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 식사를 돕는 일이 끝나면 1시가 훌쩍 지나가 버려 나는 자동차 안에서 안식구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매주 화요일은 승용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학교 급식이 있기 전까지 지겹게 아내가 도시락을 싸주었다. 퇴직 후에도 가끔 아내가 정성 들여 싸준 도시락이 어느 고급 레스토랑 식사보다 더 따뜻하고 맛있어 언제나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2020.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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