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과 영감의 삶

2020.08.06 13:35

전용창 조회 수:2

망각과 영감의 삶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전 용 창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렇게 잠을 잘 수가 있을까?

 아내는 속이 상하면 잠을 잔다. 아이들을 혼내고 잠을 자고, 나와 의견충돌이 있어도, 밖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도 집에 와서 잠을 잔다. 낮에도 조금만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린다. 참 좋은 사고방식이라며 나도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더욱더 화난 장면이 스크린처럼 떠올라서 잘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친구를 불러 어울리거나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들어오면 가라앉았다. 아내의 이런 성격은 아마도 어머니한테 전수받은 것 같다. 어머니는 자주는 아니지만 사소한 일로 가족에게 화를 내시곤 했다. 그럴 때 주무셨다 일어나시면 잊으셨다. 어머니께 원망이라도 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 하시면 끝이다. 지나고 보니 우리 가족이 화목을 이룬 것은 ‘망각’ 덕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장마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너무도 많은 사람의 인명과 재산상 수해를 입어 걱정이 크다. 어머니 아버지 산소도 토사 유실이 없을까 염려가 된다. 오늘처럼 가랑비가 오는 날은 나에게 기분 좋은 날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데 나는 하늘의 기운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덤으로 주어지는 날이다. 아침나절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며칠 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인근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도 받고 있다. 오늘은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싶어서 조금 떨어진 H 한의원으로 갔다. 출입문에 '이번 주는 휴가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그냥 Y 한의원으로 향했다. 우산 속에 비쳐진 한 친구가 생각났다. 그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취미활동이 같아서 친구가 되었는데 나의 표정을 보고도 고충을 안다. 그리고는 자문역을 다해주니 고맙다. 내가 아픈 뒤로는 반년이 지나도록 못 만났다. 그립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지. 우산을 받고 ‘삼천천’을 걷던 추억이 새록새록 난다.

 “비의 온도가 몇 도냐?”고 물었고, “비가 오도다.”라며 웃었다. 비도 오고 하니 생선탕으로 점심을 하자고 할까(?) 시계를 보니 물리치료가 끝나려면 식사 시간이 지날 것 같다. 다음에 만나야겠구나. 치료를 받고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그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친구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의 그리운 마음을 빗줄기가 전해주었을까?

 

  신은 인간에게 망각 忘却과 ‘텔레파시’라고 하는 영감 靈感을 주셨다. 우리는 값없이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망각이 없다면 슬프고 애통한 일들을 어찌 다 감당하랴. ‘법정’ 스님께서도 비워야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며 ‘텅 빈 충만’을 설파하셨다. 그렇다고 모두 다 잊을 수는 없다. 부모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추도식을 갖고 성묘도 간다. 형제자매와 우애하기 위하여 안부를 주고받는다. 소꿉동무를 잊지 않으려고 앨범을 꺼내 보기도 한다. 잊을 것과 잊지 않을 것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삶이려니 싶다.

 

  ‘텔레파시’는 망각보다 더 큰 선물인 듯하다.

 학자들은 영감이 어떤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이 언어나 동작 따위를 통하지 않고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심령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니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인 것이다. 오늘 내가 친구를 그리워하고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한 것도 영감이고, 친정어머니가 아픈 딸을 어찌 알고 전화를 하는 것도 영감이다. 미국은 아직도 코로나가 확산일로라는데 그곳에 사는 딸과 사위가 걱정된다. 그들도 아빠의 쾌유를 빌고 있을까? 나는 오늘 어머니 산소가 염려되었다. 어머니가 평생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셨듯이. 망각이 몸에는 좋다지만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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