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이 보고 싶다

2020.09.04 23:54

전용창 조회 수:2

사랑하는 딸이 보고 싶다

                             

                                    전 용 창

 

 아내는 출산예정일 보름 전에 남녘땅 벌교 친정으로 갔다. 그 무렵 나는 직장 초년생으로 감히 휴가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딸은 그렇게 아빠가 곁에 없이 외롭게 태어났다. 장인어른께서는 전화로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셨고, 어머니께서는 조금은 서운한 기색이 보였으나 첫딸은 집안의 보배라며 나를 위로해 주셨다. 삼일 뒤 주말이 되어 일찍 업무를 마치고 보성 행 버스를 탔다. “딸은 나를 많이 닮았을까, 아내를 많이 닮았을까?” 들녘은 벼 이삭이 물결을 쳤다. 마음은 급한데 버스는 자주도 쉬었다. 버스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언덕위에 있는 처갓집으로 달려갔다. 찬거리를 내려놓고는 아내의 손목을 잡았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아내는 금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말한다.

 “딸이라 서운하지요? 어머님께서도 서운해 하시지요?

 “무슨 소리야? 병원도 안가고 집에서 낳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난생 처음으로 내 새끼를 안아보았다. 너무도 가냘팠다.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아이는 낯이 선지 금세 울어버린다. 마냥 총각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아빠라는 책임감이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장인어른은 딸의 이름을 희정(기쁠, 머무를)이라고 지으셨다며 그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장차 딸이 출가하여 독립해 살아도 아빠가 찾아가면 기쁘게 맞이해주고, 편안하게 오래토록 머물게 한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이름도 참으로 예뻤다. 예쁜 나의 ‘희정이!  

 

 희정이는 건강하게 잘 자랐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예뻤다. 조금씩 말을 배워나갈 때는 더듬더듬이나마 곧 잘 따라했고 얼마지 않아서는 혼자서도 중얼거렸다.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공부도 썩 잘했다. 공부하라는 말은 한 번도 안했다. 단지 개근상이든, 우등상이든, 칭찬상이든 상만 받으면 액자를 넣어서 벽면 상단에 나란히 걸어 두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한번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희정이 일로 상담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다음날 점심식사 시간에 가기로 했다.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옆 반 동료선생님과 함께 나오셨다. 내용인즉 희정이 성적이 갈팡질팡하다는 것이었다. 반에서 1·2등을 하다가 언젠가는 10등을 하더니 심지어는 중간정도까지 처지기도 하여 교무실로 불러서 그 이유를 물으니 국어와 산수만 빼고 나머지는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아빠한테 혼난다며 일부러 틀리게 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몇 개를 틀려야하는지 잘 몰라서 그랬다니 교직생활을 하며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학부형 같으면 성적이 떨어지면 오히려 담임선생님을 나무라는데요. 원 참….

 

  "우리 딸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전교 1·2등을 했는데요. 시험 때가 되면 일주일 전부터 밥맛도 없고 긴장이 되곤 했어요. 친구사귈 틈도 없이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어요. 부모님은 어서 자라고 성화였으나, 공부가 왜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경쟁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어요. 우리 딸은 아빠가 겪은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선생님은 의아스럽게 바라보셨다. 그 무렵 희정이는 공부보다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여고시절에는 학생회장도 했었다. 나는 그런 딸이 자랑스러워서 학교 전체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대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다방면에 활발했던 딸은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A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지금은 미국의 실리콘밸리 어느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공부만 한다고 결혼한 지 10년이 다 돼가는 데 손주가 없으니 나는 걱정만 하지만 딸은 얼마나 외로울까?

 

 지금껏 나도 남들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살아왔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게”를 가끔 낭독하는 것을 보면 많이 외로운가 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중략)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우리 딸은 유독 수선화 꽃을 좋아했다. 채소밭가에 수선화를 많이 심었다. 봄이 오면 노오란 수선화 꽃을 보며 달래고 가을이 오면 처갓집에서 달음박질하던 추억을 되새기며 달랜다. 얼마 전에 딸과 통화를 했다.

 “희정아, 미국은 ‘코로나19’가 많이 확산되고 있던데  너희들은 건강하냐?

 “한국에 와서 아빠랑 같이 살면 안 될까? 요즈음 우리 딸 많이 보고 싶다!” 딸은 금시 목소리가 잠기더니 울어버린다.

 “아빠,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나도 한국에 가서 살고 싶은데 오빠는 싫다고 해요. 저도 아빠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어느새 내 눈가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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