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새

2020.09.05 23:52

정근식 조회 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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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새

정근식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지난 연말 인사발령이 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발령이라 무척 당황했다. 형평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인사라는 생각이 들어 인사담당자에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직장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내가 직장을 둔그만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특별한 재주가 없어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농사라도 지어 볼까 싶지만 직장생활보다 농사일이 훨씬 어렵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자신이 없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나가면 영락없이 실업자 신세다.
근무지를 옮긴지 며칠째 되던 날 업무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지금까지 업무보고는 주로 담당과장이 현황을 만들어 간단하게 보고만 했는데 이곳 지사장의 요구는 달랐다. 현재 지사가 처해진 여건과 현황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문제점을 밝혀내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대책을 세워 보고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전 직원들 앞에서 내가 직접 발표까지 하라고 했다. 타권역에서 온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아 언짢기도 했지만 근무지를 옮기자마자 문제점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옆에 있는 다른 동료에게 부탁을 했다. 고민을 이야기하자 흔쾌히 자신이 만들어 주겠노라고 했다. 실적과 문제점 등 간단한 분석 자료를 동료에게 메일로 보내주었더니,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과 해결책을 추가하여 깔끔하게 보고서를 만들어 주었다. 보고하기 쉽도록 도표와 그래프까지 섞어 보기도 좋았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이번뿐만은 아니다. 20년 전 입사시험 때 보았던 영어단어가 마지막 영어였으니 외국인이 방문만 하면 다른 직원에게 안내해야 했고, 힘들고 어려운 일 역시 당연하다는 듯 다른 직원에 의존했다. 그때마다 잠시 나의 무능함을 느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책이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위안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 무능함의 충격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내 모습에서 현실에 안주하여 300여 년 전에 멸종해버린 도도새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남인도양 모리셔스 섬에 도도새가 살았었다. 모리셔스는 지각변동으로 다른 대륙과 수백 킬로 이상 떨어진 섬이다. 그 섬에는 카바리아 나무가 있었는데 도도새는 그 열매를 먹고 살았다. 떨어진 카바리아 열매만으로도 먹이가 충분했다. 그래서 도도새는 먹이를 얻기 위해 힘든 날갯짓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대륙과 워낙 멀리 떨어져 도도새를 위협하는 천적이 없어 도망 다니기 위해 몸집을 줄이고 다리를 튼튼히 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리셔스섬은 도도새에게는 천혜의 서식지였다.
내가 20년 동안 공직에 안주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도도새 역시 자신에게 처해진 환경에 매우 만족하며 모리셔스 섬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바닥에 널려진 카바리아의 많은 열매는 도도새를 비대하게 했고, 날갯짓을 포기하면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날갯짓이 없었던 도도새는 결국 날개가 퇴화되었고, 짧은 다리는 더욱 약해져 늘어난 몸집을 감당하지 못해 오리보다 심하게 뒤뚱거렸다. 또한 자신을 위협하는 천적을 본 적이 없어 자신을 경계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인간이 처음 모리셔스섬에 들어갔을 때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을 경계하기는커녕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졸졸 따라다녔고, 인간이 해치려고 몽둥이를 들어도 도망갈 줄 몰랐다고 하니 어찌 살아남았을 수 있을까.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고 지냈던 도도새가 인간이 본격적으로 모리셔스섬에 들어간 지 십수 년도 되지 않아 멸종해버렸고, 지금은 전설 속의 새가 되었다.
20년 동안 나는 날갯짓을 잃어버린 도도새였다. 모리셔스 섬의 카바리아 나무가 모두 내 것인 줄 알았다. 카바리아 나무열매가 항상 내 곁에 있고 나를 위협하는 그 어떤 천적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카바리아 나무 열매를 먹기에만 바빴고 고유한 날갯짓도 잃어버렸다. 하지만 모리셔스섬이 조금씩 가라앉아 언젠가는 카바리아 나무열매가 없어지고 주위에 천적이 많아진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았다. 그래서 나는 퇴화되어 버린 나의 날개를 되살리기 위해 수없이 날갯짓을 해야 하고, 비대해진 몸도 줄여야 한다. 날갯짓을 늘리고 몸짓을 줄이며 도도새의 조상이 처음 날아온 그날처럼 내가 이 직장에 처음 온 그날의 나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너무 오래 세월이 지난 지금, 몸짓을 줄이고 수없이 날갯짓을 하면 처음에는 날개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하늘을 나는 것이 두렵겠지만 그것이 미래를 살아가는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을 알기에 무작정 시도해 보련다. 직장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멸종된 도도새의 진실이 현실에 안주해 온 나에게 작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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