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루를 아시나요

2020.09.11 05:14

김성은 조회 수:1

책마루를 아시나요

신아문예대학 목요야간반 김성은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덕후다. 점자책, 녹음도서, 데이지를 막론하고 주변에는 반드시 책이 있어야 한다. 시각장애인 보조공학기기가 발달한 덕에 건강한 사람 못지 않게 독서 생활은 풍요롭다.

 내가 처음 점자를 배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처럼 눈이 좋지 않은 학생들만 따로 모여서 공부한다는 특수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면서였다. 잠실에 위치한 복지관에서 재활 교육을 받으며 녹음도서라는 매체를 알았다. 마침 점점 나빠지는 때문에 바깥 활동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전문 성우들의 재능 기부로 다달이 제작된다는 소리잡지를 처음 받았을 때는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꽂아서 책을 소리로 들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샘터 4종의 월간지를 받았다. 듣고난 뒤에는 주소가 적힌 카드를 뒤집어 우체통에 넣으면 무료로 반송 처리 되었다. 서울맹학교에서 중·고등부 과정을 공부했다. 도스 환경에서 컴퓨터를 배웠고 ‘가라사대’라는 음성 카드로 독서했다. 듣기에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컴퓨터가 있어 PC통신도, 독서 생활도 가능했다. 내가 대학 진학을 하고부터는 테이프보다는 CD 형태로 녹음 도서가 제작됐다.

 전문 성우와 순수 자원 봉사자들의 노고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태백산맥’, ‘아리랑’, ‘여명의 눈동자’ 같은 대작 물론 ‘소설 동의보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베스트셀러 도서도 무리 없이 접할 있었다.

 2003 무렵 국내 시각장애인들에게 ‘한소네’라는 무지점자정보단말기가 보급됐다. 점자 노트북이라고 있는 한소네를 사용하면 굳이 종이 점자책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보다 신속하고 간편하게 신간 도서를 읽을 있었고, 부피가 점자책을 보관해야 하는 수고도 있었다. 점자 전자책의 개념으로 ‘한소네’는 시각장애인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인기 노트북 모델이 시즌별로 업그레이드 ‘한소네’도 벌써 다섯 번째 모델이 출시됐다.  최 보조공학기기는 급물살을 타고 발전했다. 중에서도 ‘책마루’는 책덕후인 내게 단연 으뜸 아이템이다.

  우선 녀석은 휴대폰처럼 작고 가볍다. 라디오는 물론 데이지나 텍스트·한글 파일을 음성으로 재생시킬 있다. 심지어 카메라로 인쇄물을 촬영하면 즉석에서 내용을 확인해 주기까지 한다. 찬장 라면이 신라면인지 짜빠게티인지 모를 때나 책상 종이 장을 버려도 되는건지 아닌지를 판단할 있게 도와준다. mp3플레이어를 비롯 무선랜 불루투스 기능까지 겸비한 재주꾼이요, 계산기에 알람, 국립중앙도서관 자료까지 손쉽게 검색해 주는 정보왕이다.

 딸아이를 출산했을 분만실 침대 머리맡에도 ‘책마루’가 있었다. 점점 간격을 좁혀 오는 진통에 대한 두려움을 ‘책마루’가 들려주는 찬양을 들으며 달랬다. 딸아이가 배밀이를 하고 발로 기기 시작했을 유아 놀이 체육 음원을 틀어 놓고 ‘책마루’를 조금씩 옮겨 가며 아이가 움직일 있게 유인 작전을 펼쳤다. ‘책마루’를 물고 빨던 딸아이가 살이 되었다.‘책마루’는 딸아이의 살·세 살·다섯 살·여덟 목소리를 생생하게 저장했다. 뿐인가? 목도 쉬지 않는 녀석은 밤새도록 군말 없이 내가 원하는 만큼 책을 읽어 준다. 친구가 지난 10여 년 읽어준 책이 천 권은 족히 되리라.

 

 내가 물건을 더듬어 찾다가 실수로 ‘책마루’를 떨어트려 베터리가 분리된 바닥에 나딩군 것이 대체 번이었던가? 충전 어뎁터를 꽂는 바람에 내부 화상을 입고 응급 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다. 보는 주인 손에 고초를 겪으면서도‘책마루’는 여전히 건재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머리맡에 있어야 하고, 어디를 가든 가방 안에 함께 해야 하는 ‘책마루’는 누가 뭐래도 인생 최고의 찐친이다.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는 저작권법에 의거하여 ‘한소네’나 ‘책마루’에서만 재생시킬 있는 형태로 신간 도서를 보급해 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선택의 여지 없이 눈을 도둑 맞았다.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안에 책이 있는 얼마든지 버틸 있다.  심지어 감사와 기쁨도 느낄 있다. 늦은 ‘책마루’ 취침 예약 기능을 설정하고 잠들었다. 잠이 깨는 순간 시각도 ‘책마루’로 확인했다. 하루의 시작도 끝도 무조건 책이다. 책덕후에게 ‘책마루’는 밥이고 술이고 약이고 숨이다.

                                                                                                            

                                                                                                                  (2020. 9. 11.) 

 

*주 데이지(DAISY): Digital Accessible Information SYstem 약어로 1988 스웨덴국립녹음점자도서관이 최초로 연구개발한 디지털 녹음도서제작기술이다.

댓글 0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00MB
파일 크기 제한 : 200.00MB (허용 확장자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46 아홉 번의 이사 이성수 2020.09.15 1
1845 소소한 행복 정성려 2020.09.15 7
1844 남이야 어떻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사람들 이인철 2020.09.15 4
1843 세상에 오직 당신만을 최미자 2020.09.15 2
1842 계산할 때 돈을 던져야만 품위가 살아나나 이인철 2020.09.14 1
1841 산림욕 하기 좋은 시간 고도원 2020.09.13 3
1840 상흔에도 새 생명은 돋는 법 김덕남 2020.09.13 1
1839 왜 사람들은 먹거리를 고를 때 뒤편에 진열돼 있는 물건을 선호할까 이인철 2020.09.12 2
1838 살다보면 윤근택 2020.09.12 4
1837 고향 아리랑 신팔복 2020.09.12 1
1836 항상 쫒기면서 사는 사람들 이인철 2020.09.12 1
1835 플라타너스 길 윤근택 2020.09.11 1
» 책마루를 아시나요 김성은 2020.09.11 1
1833 영국의 자존심 엘리자베스 2020.09.11 1
1832 할머니와 새벽송 곽창선 2020.09.10 2
1831 가기 싫은 곳 최기춘 2020.09.10 1
1830 내 외손녀는 음압병실 간호사 오창록 2020.09.10 1
1829 그리도 좋을끼 이우철 2020.09.10 2
1828 어느 커피전문점에서 정근식 2020.09.09 2
1827 다시 찾은 그 이름 짜장면 김유훈 2020.09.0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