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길

2020.09.11 17:52

윤근택 조회 수:1


                                                      플라타너스

                                                  

                                                                                                                                                                                                                                                     윤근택(수필가)

 

나는 가을이라도 가로수인 플라터너스잎이 지는늦가을이 되면, 어떤 길을 생각하게 되고, 그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길과 가로수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

미리 말하건대, 우리네가 늙어감을 두고, 요즘 들어 부쩍 익어감이라고 자위삼아 말하던데, 농부인 나는, 과수농사도 제법 하는 나는, 익어감에도 유의해야 점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익되, 너무 짓물러터져서는 곤란하다. 그러면 과일로서는 아무짝에도 못쓴다. 익되, 어느 정도까지는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 추억도 마찬가지다. 마냥 과거 지향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리 남아있기에 그렇다. 아직도 우리가 걷는 길은 아름답기에 그렇다. 환갑 나이에 이르러, 되짚어 보니, 나는 그 누구 못지않은 부자다. 나름의 추억을 잘 갈무리해둔 덕분이다. 훗날을, 먼 훗날을 미리 준비하곤 하였던, 예술가였다는 것을. 이미 그때부터 예술가였다는 것을. 참말로, 나는 젊은 날에도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기본자세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실천하였던 듯하다. ‘손에 든 한 마리의 새가 덤불 속 두 마리 새보다 값지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남의 작품을 통해 얻는 대리만족보다는, 자신이 그 불두덩에 빠져들었던, 자신의 이야기가 언제든 값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추억의 앨범을 한 권 지녔으며, 이 늦가을쯤이면 그 앨범을 한 장 한 장넘기며 추억의 흑백사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추억 더듬기다. 우리네가 늙어간다는 거, 그것은 추억거리가 차츰 늘어나 차츰차츰 부자가 되어 가는 거다.

사설(辭說)이 길어졌다. 첫 단락에서 말했던 그 길과 가로수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치고자 한다. 나의 20대 생활은 죄다 그 길과 그 길가 가로수를 배경으로 이뤄졌다. 재수(財數)없는 재수(再修)를 한 나. 그해 1, 동대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조치원에 잠시 멈춰 섰다. 밖은 어둑어둑 했다. 행인에게 물었더니, 충청남도에 속한 조치원과 도()는 달리 하지만, 청주시로 가는 청주의 시내버스가 코 앞 역전(驛前)에 온다고 했다. 나는 그 시내버스를 타고 청주로 향했다. 조치원과 청주시를 잇는 그 길의 가로수는 모두 플라타너스였다. 앙상한 가지들은 봄을 기약하며 겨울을 맞고 있었다. 그렇듯 물어물어 찾아간 청주의 충북대학교. 사실 당시는 충북대였다. , 농과대학과 미술교육과를 포함한 몇 몇 학과를 지닌 단과대학이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 이튿날 입학시험 결과, 농과대학 임학과에 운 좋게도 합격했다.

나의 대학생활 전반은 그 청주의 플라타너스길에서 이뤄졌다. 시내가 아닌 외진 마을에 자취방을 구해, 아침저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 플라타너스길. 나의 사색과 나의 번민과 나의 사랑... 참말로, 20대가 고스란히 그 플라타너스길과 관련이 있다. 캠퍼스 내 현상문예에 당선한 이파리도 바로 그 길에서 얻은 것이고, 그 작품은 내 수필문단 데뷔작이나 진배없는 처녀작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그 플라타너스길을 배경으로(?) 어느 서양화 전공 여대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 그녀를 최초로 알게 된 것은, 교양선택과목 문학개론 첫 시간. 그녀는 교수가 출석을 다 부른 후에 강의실로 들어섰다. 학기 내내 교재도 준비하지 않은 긴 머리, 노란 재킷 여대생이었다. 첫눈에 끌려 매주 그 강의시간만 돌아오길 기다렸다. 복학생이었던 나는 일부러 그녀와 함께 앉곤 하였다. 더군다나 그녀도 나와 취향이 비슷했다. 그녀도 시내와 꽤나 떨어진 그 플라타너스길 휴암 이란 동네에 자취방을 구해 살았다.

시내와 꽤나 떨어진 그녀가 자취하는 도로변 2층 슬래브. 그녀의 아틀리에 에 들어서면, 벽면에 커다란 유리병에 갇힌 여성 유화(油畵)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손수 그린 그림인데, 상징성이 있는 듯했다. 나는 그 어두운 밤, 예고도 없이 자주자주 자전거 페달을 밟아 달려가서 그녀의 창을 노크했다. 그녀는 결코 반겨주지 않았다. 그래도 비를 통째로 맞은 내 모습이 측은했던지 문은 열어주었다. 내 책가방에는 언제고 포도주와 그녀 취향의 담배가 들어 있었다. 둘은 연기로 자욱해진 아틀리에서 예술을 이야기하였다. 문학인들의 삶과 미술가들의 삶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곤 하였다. 눈이 아주 크고 맑았던 그 여대생. 담배연기가 눈에 들어가서 곧잘 눈물 흘리던 그녀. 그 눈물이 내 은근하고 끈기 있는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 그녀는 마치 갑자기 정신 차린 듯, 엄연한 현실로 돌아온 듯, 짜증 섞인 말을 하곤 했다.

윤근택씨, 밤이 너무 늦어졌어요. 이젠 일어서야지요. ”

그렇게 쫒겨나다시피 해서 내 자취방으로 돌아온 것이 그 얼마였던가.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커피숍에서 알듯말듯한 말을 건네왔다.

윤근택씨, 저 사랑하시는 거 잘 알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그러나 죄송해요... .”

졸업 무렵, 한번은 그곳 휴암 그녀의 아틀리에를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 유리창에 커튼만 바람에 나부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잃은 게 그저 청춘만은 아니다. 후일, 그녀는 엽서 한 장을 부쳐왔고, 경남의 어느 학교 미술선생님이 되어 있다고 했다. 또 부지런한 세월이 흘러, 그녀는 내가 사는 경산과 그리 멀지 않은 경남 거창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별을 보내온 적이 있다. 사실은 그녀가 최근까지 나의 애독자로 남아 있다. 나는 그때부터 나 자신과 맺은 약속을 제대로 지켜 문학인의 길을 이처럼 30여 년 착실히 걸어왔는데, 그녀는 작품 전시회 한 번이라도 제대로 열었으려나 모르겠다. 여태 유리병 속에 갇힌 여인일까? 20대에 예술적 영감(靈感)을 그리도 많이 주었던 노란 재킷의 여대생’. 그녀는 그 플라타너스길 도로변 2층 아틀리에에 살았다.

이제 내 신실한 애독자들한테도 그 플라타너스길에 관해 좀 더 상세하게 안내코자 한다. 청주에서 조치원으로 향하는 길에 심겨진 플라타너스다. 그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 든다. 청주의 명물이다. 1500여 그루가 서 있고, ‘가로수 터널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 만추와 드라마 모래시계에도 나왔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52년 당시 청원군 강서면장이었던 홍재봉씨가 처음 심게 되었다는데... . 하여간, 누구든지 죽기 전에 한 번은 거닐어볼만한 길이다. 나는, 수필작가인 나는, 젊은 날 그토록 자주 사랑과 고뇌, 번민을 앓던 길이었다는 거.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내가 명색이 임학도(林學徒)였으니, 덤으로 알려드릴 게 있다. 플라타너스는 영어로 ‘platanus’로 쓴다. 버즘나무과(platanaceae) 버즘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다. 내가 익힌 수목학 교재에는 ‘plain-tree’로 되어있다. ‘plain’ 평면을 일컫는데, 학자들의 지적오류(知的誤謬)로 여겨진다. 분명 당시 수목학을 강의하셨던 노은사(老恩師)께서는 평원 내지 평야에서 잘 자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다시 상기하자니, ‘plane-tree’가 옳을 듯하다. , 플라타너스는 버즘나무란 이름 외에도 방울나무라는 이름도 지녔다. ‘방울나무는 우리말을 비교적 아름답게 쓰려고 애쓰는 북한사람들이 지어 부르는 이름이다. 버즘나무는 수피(樹皮)가 우리 얼굴에 생기던 버즘처럼 벗겨지는 데서 유래한 이름, 방울나무는 그 열매가 방울처럼 달려서 생긴 이름. 이 버즘나무는 세 종류다. 열매가 세 개 또는 그 이상 조르르 달리면 버즘나무, 열매가 한 개 달리면 양버즘나무, 열매가 한 개 내지 2개 달리면 단풍버즘나무. 단풍버즘은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의 잡종으로, 그 수피가 아름답고 토양정화 능력과 대기오염을 줄여주고 병 저항성이 뛰어나며 속성수(速成樹)라서 가로수로 즐겨 심는다. 버즘나무는 삽목(꺾꽂이)로 번식시킨다. 공자님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히포크라테스는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제자들한테 강의했다는 사실.

끝으로, 임학도였으며 시인 지망생이었던 나는 농부가 되었고, 기어코 수필작가가 되었음을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알려드리며, ‘20대의 스케치인 플라타너스에 관한 글 맺으려 한다.

제 1신)

또 밤 내내 뒤척였지요.

날이 밝아오면,

또 다시 아름다운 이야기 들려주어야하겠기에요.

예고편인 걸요.

박인희의 끝이 없는 6 (나비구름님 늘 행복하시길) 2015.10.22

몇몇 날 생각했던 글감이었어요.

부디 좋은 하루 열어가세요.

이 농막 둘레 귀뚜라미들은

더 늦기 전에 짝을 찾으려는지,

이 새벽까지, 수컷들은 세레나데를 마구 불러대어요.

그 녀석들은 배가 고프면 우리 가을김장배추며 김장무도

그 어린 속잎을 뜯어먹곤 해요.

해서, 미안하지만 살충제를, 그것들 작물이 어릴 적엔 자주

쳐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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