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흔에도 새 생명은 돋는 법

2020.09.13 05:13

김덕남 조회 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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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에도 새 생명은 돋는 법



김덕남







역대급 긴 장마의 홍수는 도로를 부수고 마을을 수장시키며 가슴 아픈 인명 사고를 냈다. ‘바비’ ‘마이삭’ ‘하이선’이란 이름을 단 태풍이 연이어 한반도를 할퀴며 상처를 남겼다. 반짝 땡볕이 내리 쬐던 어느 날, 싸한 울음을 토해내던 쓰르라미는 자취를 감추었다. 제법 서늘바람이 부는 이른 아침, 천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지난번 수마에 뿌리째 뽑힌 하천의 나무들이 여기저기 길게 누워있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나를 미소 짓게 하던 작은 키의 하얀 개망초와 노란 기생초 무리도 흔적 없이 씻겨가고 없어, 보는 내 마음마저 황량했다. 나는 이미 탈을 쓴 얼굴 위에 코로나를 빙자한 복면 수준의 또 하나의 탈을 썼다. 상쾌한 이 공기에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사람들도 나처럼 얼굴 가리기를 즐기는 듯했다.

선발집단이라고 자부하는 여고를 졸업했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긍지로 살아온 나는 아직도 종이통장을 고수하고, 은행창구만을 신뢰한다. 새로운 문명의 시스템 활용을 번거로운 일로 치부하며 외면하다 보니 ‘배운 사람이나 안 배운 사람이나 똑같다.’라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내 손자 손녀들은 이미 신체 일부가 된 폰 하나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호모사피엔스’ 경계 너머 ‘포노사피엔스’ 시대에 가 있다. 무지개의 마지막 색인 보라색 응원봉을 흔들며 KPOP 아이돌 ‘방탄 소년단'의 아미를 자처하고 끝까지 응원하고 지키겠다며 ‘I Purple You!’를 외친다. 그런데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고, 교활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포노의 지혜에 앞서 제 몸에 뿔을 달고 진화하여 그들마저 두려움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홍수와 태풍과 산불과 바이러스의 재난은 다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 한다. 도를 넘는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계를 훼손하고 파괴하여 불러온 재앙이라 했다. 기후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로 거대한 빙하가 녹아내려 해수면과 수온이 높아지고, 기후변화의 악영향은 오래지 않아 지금의 두 배에 달하는 자연재해를 몰고 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하고 있다.

슬로우 라이프는 뒤떨어진 삶이고, 개발 급성장만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 여겼다. 나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빌딩의 숲에 찬사를 보내며 흙밟기를 거부하고 단단하게 정돈된 포장길을 반겼다. 말 못하는 곤충들을 무차별로 잡아, 그들의 몸에 핀을 꽂고 내어린 날의 여름방학 숙제물로 당당하게 바쳤다. 풍뎅이 목을 비틀어 눕히고 몸부림치는 날갯짓에 손뼉 치며 즐거워하기도 했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내어주신 먹을거리이니 괘념할 건 없다지만, 채식주의자나 Vegan이나 도롱뇽 서식지 파괴를 저지하는 이들의 적극적인 행동만큼은 아니더라도 생명체에게 겸손함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사랑하는 내 손자손녀들에게 건강한 지구를 물려줘야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존경하는 석학 김형석 교수는 민주화 운동의 홍콩 시민과 대다수의 국민투표로 마련한 거액의 재난지원금을 거부한 스위스 시민을 소개한 일이 있다. 그리고 무지렁이 ‘민초’와 알면서도 작은 이익에 눈먼 ‘백성’과 불의에 깨어있는 ‘시민’으로 의식 수준의 계급을 나누었다. 2천조에 육박한 국가 부채를 걱정하면서도 나만 포기하는 건 의미 없다며 재난지원금을 덥석 받아, 남의 살점이나 먹는 일에 써 버린 나는 어느 계급에 속할까?

코로나19는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우리의 의식과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산불의 상흔에서도 새 생명은 돋는 법. 그러기에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류의 역량과 포노사피엔스의 지혜와 굴하지 않고 깨어있는 많은 시민의식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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