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의 노래

2020.09.17 13:07

한성덕 조회 수:6

호반의 노래

                                              한성덕

 

 

 

  9월의 어느 멋진 목요일이었다. 가녀린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드높이 솟은 뭉게구름이 방실대자, 자동차의 희뿌연 매연도 몸을 사리는 오후였다. 집밥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 집의 초롱이를 데리고 아내와 산책에 나섰다.

  전주의 아중호수는 적당한 크기로 전주시민의 사랑을 받는다. 합성목재로 호수둘레 길을 깔끔하게 단장했다. 모든 사람들의 데이트 장소로 제격이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끼리끼리 마냥 좋아서 희희낙락거린다. 시샘하는 건가? 가끔은 주인 따라 끼리끼리 산책하는 애견도 보인다. 수변 길을 따라 걷다가 마지막 코스에서 야트막한 산을 오른다. 그래도 호수 한 바퀴를 산책하는데 한 시간 남짓이면 족하다. 아중호수는 언제나 생동감이 넘치고 사람 사는 맛이 난다. 걱정이나 근심마저 사라지는 듯하다. 끼리끼리 보듬어주는 안정적인 마음과, 모든 것을 호수에 내던지고 홀가분해진 탓인가 보다.

  찬연(燦然)한 불빛이 손짓하고, 잔잔한 물결은 은가루를 토해내며, 솔바람은 호숫가에 설치된 가설무대의 노래를 실어 나르는데 6070의 노래가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무명의 가수가 김세환 씨의 ‘사랑하는 마음’을 부르는 게 아닌가? 그 노래에 심장이 콩닥거리고, 세포조직은 꿈틀대며, 입에서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군대시절의 추억이 살아난 탓이다.  

  훈련소에서 부여받은 주특기와 상관없이 32사단 부관참모부에 배속되어, 인사과 인사행정병으로 33개월 10일의 군 복무를 마쳤다. 대기병력 150여 명 중에서 필체로 뽑힌 병사 5명이 선발되고 최종적으로 두 명이 뽑혔다. 두 명 중에서도 내 글씨가 더 낫다하여 인사과에 발탁되었으니 행운아가 아닌가? 그때만 같았으면 세상사는 재미도 꿀맛이었을 것이다.

  우리 내무반에는 병사들 2,30명이 있었다. 아침 6시 기상나팔이 울리기 전의 노래 90% 이상은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군대는 남성들만의 세계여서 딱딱하고 건조하다. 그 때문에 ‘보드라운 마음을 가지라’고 상부에서 내려온 지침이었는지, 내무반장의 특별지시였는지, 아니면 마지막 불침번의 한결같은 애창곡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좌우지간 15분 전부터 내무반 전축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워낙 노래를 좋아했으니 대중가요를 눈곱만큼만 사랑했더라도 가수의 호흡까지 흉내 냈을 것이다. 허나 그때만 해도 그런 노래자체를 죄악시했으니 귀에 들어오겠는가? 나이가 들어 노래의 평준화가 되었지만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 노랫말이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천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 걸/ 밀려오는 그 마음보다 포근한 건 없을 걸/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행복/ 억 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사랑해/ 사랑하는 마음보다 신나는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짜릿한 건 없을 걸/ 짜릿한 건 없을 걸”

 

  지난날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을 때는 없어 보인다. 싱싱하고, 짜릿하며, 꿈에 부풀 때가 아닌가? 요즘은 20대의 기분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흥얼흥얼 한다. 그런 기분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처럼 좋은 건 없다. 6070의 노래를 부르던 호반의 무명가수에게서 배웠다. 그 호수의 산책이 요즘 들어 부쩍 늘었다. 가슴이 부풀었던 기대감 때문이다.

                                          (2020. 9.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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