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 앞에서

2020.09.18 12:58

윤근택 조회 수:4

            나무난로 앞에서

 - 아흔다섯 번째, 아흔여섯 번째 이야기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95.

  조손은 또 다시 나무난롯가.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 으뜸이도 봄을, 제대로 된 봄을 무척 기다리나보다. 사실 농막 유리창을 후려치며 꽃샘바람이 드세게 불어대는데... .

  이 할애비는 녀석의 봄을 기다리는 그 초조함과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나름대로 묘안을 짜낸다. 잠시 개울가로 가서 갯버들 가지를 꺾어와 녀석한테 보여준다.

  “한아버지, 이 으뜸이는 금세 알겠다? 이 나무는 버드나무, 여기 가지에 조롱조롱 달린 것은 버드나무의 꽃인‘버들강아지’. 어머,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봄은 우리 곁에 와 있었네.”

  참으로 영리한 녀석이다. 해서, 이 할애비가 이번에는‘버들’에 얽힌 이야기를 이 난롯가에서 이어갈 수 있게 생겼다.

  “으뜸아, 버드나무과의 나무를 보면, 네는 무엇이 떠올라?”

  그랬더니, 녀석은 지난 해 이 할애비랑 물오른 갯버들 가지를 비틀어 ‘호드기’를 만들었던 것이 떠오른다고 한다. 정말로, 조손은 그렇게 한 적이 있다. 더 떠오르는 게 없냐고 하니까, 고개를 갸우뚱대기만 한다. 사실 이 할애비는 ‘묏버들 갈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로 시작되는 기생 ‘홍랑’의 절절한 연애시부터 떠오르건만... . 그 시에 얽힌 이야기는 요 다음 녀석이 제법 컸을 때 들려주기로 하고... . 기왕지사 임학도였던 이 할애비이니, 버들이 우리네 인간들한테 베푼 은혜를 들려주는 게 좋을 듯.

  “으뜸아, 감기치료를 비롯하여 만병통치약으로까지 알려진 ‘아스피린’은 그 무엇도 아닌 버들의 껍질에서 얻는다?”

  그러자 녀석은 두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려 든다. 나의 이야기는 하찮았던 독일의 바이엘 제약회사가 다국적 기업으로 우뚝 솟게 된 내력에 닿는다.

  독일의 어느 마을 연못의 물은 마시기만 하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내려왔다. 일종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그렇게 전해져 왔다. 많은 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그 물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썼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자 형편없었던(?) 바이엘 제약회사 연구진들이 그곳에 가서 드디어 그 정체를 알아내게 된다.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류의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그 나무들은 뿌리를 물 바닥에 허옇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버드나무에서 얻어낸 약제가 바로 ‘아스피린’. 그 아스피린은, 물이 좋아 물가에 살기에 ‘Salix(그리스어로 ‘물을 좋아하는’의 뜻을 지님.)’이란 학명을 지닌 버드나무류의 껍질 추출물에서 얻는다. 바이엘 제약회사는 그렇게 만들어낸 아스피린 하나로 일약 세계적 제약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아주 솔깃하게 듣던 외손주녀석이 환호한다.

  “버드나무 팟팅(파이팅)! 바이엘 팟팅!”

  나무난로의 불문을 열고 장작개비 하나를 더 집어넣는다. 아직은 ‘꽃피움’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일어도, 조손은 곧 김소월이 노래했듯,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하며 가는 봄을 아쉬워하게 되겠거니.


  96.

  조손은 다시 나무난롯가. 이 할애비는 어제 버들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돌무화과’이야기를 녀석한테 들려주기로 한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10여 년 전 EBS에서 본 다큐였다. 그때 여성 내레이터(narrator)의 목소리가 어찌나 감칠맛 나고 감동적이던지. 그 여운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으뜸아, ‘아프리카 여왕’이란 말 들어본 적 있니?”

  그러자 녀석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천만다행이다. 녀석이 몰라야 이 할애비는 신나서 이야기할 수 있으니.

  “ ‘아프리카 여왕’은 그곳 특산의 ‘돌무화과나무’를 일컫는 말이야. 그곳 사람들이 돌무화과나무을 여왕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는 ‘자연의 어머니’가 살고 있다. 나무들 가운데 여왕이다. 모성애를, ‘어머니의 젖줄’을 지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돌무화과나무다. 습기가 많은 강어귀에서 쑥쑥 자라서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맺으면, 이 나무가 서 있는 숲 부근의 온갖 생물들이 몰려들어 여왕이 베푸는 넉넉한 선심을 누린다.

  그런데 그 나무는 열매만 보이고, ‘은둔화서’라는 독특한 구조로 꽃을 피우는 관계로, 꽃이 없어서(보이지 않아서) 무화과나무라 한다. 그 무수히 달렸던 열매가 여러 짐승들한테 또 먹히고 떨어지면서, 나무의 몸이 제법 가볍게 되었을 때 이번에는 그 무성하던 나뭇잎마저도 미련없이 노랗게 떨어뜨린다. 그러면 토양은 더욱 비옥해진다. 그런 다음 다시 수액이 오를 우기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 돌무화과가 나무 중의 여왕인 것은, 아주 크게 자라서만은 아니다. 그녀는 온몸으로 자연을 사랑한다는 거. 나무줄기 한 귀퉁이 옹이를 삭혀서 스스로 구멍을 내고, 그 옹이구멍을 ‘코뿔새들’한테 무상으로 세를 내어주고, 그들의 사랑 노래를 들으며 그 소리에 따라 푸른 잎을 돋으며 물을 길어 올린다. 이즈음에 코뿔새 암컷이 사랑의 결실인 알을 품는데, 자신이 들어간 큰 구멍 입구를, 여왕인 돌무화과의 살점을 뜯어 타액을 섞어서 아주 작게 출입구를 메우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한다. 이때 코뿔새 수컷은 암컷이 알을 품는 동안 짝에게 먹이를 날라다 주는데, 멀리 날아가지 않고 그 나무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곤충들만으로도 충분히 먹이를 구할 수 있다. 이때 여왕은 많은 잎을 푸르게 펼쳐서 여치, 분홍사마귀, 자벌레 등 여러 벌레들한테 자신의 잎을 먹인다. 또한, 여왕은 자기 곁을 지나가는 기린, 사슴, 코끼리, 원숭이한테도 땅 위로 늘어진 잎사귀를 먹도록 넉넉히 허락한다.

  우기가 시작되면, 여왕은 또 다시 달디단 수액을 뽑아 올려 열매를 송글송글 맺기 시작한다. 이 몸에서 솟아나는 수액은 많은 숲속 동물들의 간식거리가 된다. 매미, 풍뎅이, 벌, 개미, 나비 등의 날벌레들이 빨아대고 원숭이와 기린은 여왕의 몸을 핥아대며 우기를 보낸다.

  한편, 파랗게 매달린 무화과는 과육 속에 꽃을 숨기고 있는데, 그래서 꽃이 보이질 않아 무화과라고 한다. 그 꽃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랑의 메신저’는 오로지 ‘무화과 좀벌’. 그것도 날개를 달고 있는 암컷들만. 그 입구가 너무 좁아 좀벌의 진입을 위한 몸부림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 나무가 여왕의 혈통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무화과 좀벌과 오랜 공생관계 덕분. 나무는 열매 속에 무화과 좀벌이 알을 품도록 하여 키워주고, 무화과 좀벌은 그 대가로 목숨을 바쳐 나무의 ‘꽃밥’을 날라 수정해준다. 이 좀벌은 아주 먼 다른 무화과 열매에서 나온 여왕벌인데, 이미 위에서 말했지만, 너무 열매의 출입구가 좁아서 그 속으로 들어갈 때 자신의 몸이 터져 내장이 쏟아지면서까지 들어간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열매 안으로 숨어들어 자신의 온 몸에 묻혀온 꽃밥을 암술머리에 묻혀 수정토록 하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무화과 과육에 알을 낳고서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무화과의 꽃은 중매쟁이인 좀벌의 도움으로 수정되고, 그 보답으로 또 다른 생명체인 무화과 좀벌을 키워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무화과 열매가 익어가면서 그 달콤한 향기를 풍길 때 숲속의 온갖 동물들은 영양이 풍부한 그 열매를 따먹기 시작한다. 더욱 갸륵한 점은, 자기의 열매가 설익었을 적에는 잘려진 자기 열매 끝이나 상처 난 잎사귀나 가지에서 끈끈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우윳빛 수액을 분비하여 그들의 접근을 막는다는 거. ‘아직 때가 아니다.’ 하는 듯.

  이런 여왕의 자기보호본능도 무색하게 하는 벌레가 있는데, 그 벌레는 여치다. 여치는 여왕이 고약한 냄새를 내는 수액을 상처부위로 미처 올리기 전에 가지에 달린 잎사귀 끝부분의 수맥을 먼저 잘라서 수액의 분비를 막고 그 잎을 떨어뜨려 먹어댄다.

  여왕의 여정은 이어져 열매가 다 익어 가면, 열매는 과피가 물러지고 과육은 달콤한 내음을 풍긴다. 그러면 이번에는 벌과 개미를 불러대는데, ‘무화과 좀벌’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긴 꼬리 기생벌’이 그 부드러워진 과육을 그 긴 침으로 뚫고 좀벌이 부화되는 알속으로 자신의 알을 또 다시 심어 놓는다. 그러면 여왕과 공생관계인 그 좀벌은 미처 부화되기도 전에 더러는 기생벌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긴 꼬리 기생벌’한테도 천적은 있다. 바로 개미다. 본디 세상의 많은 종류의 개미들이 그러하지만, 그것들은 진딧물을 키운다. 그 진딧물의 꽁무니에서 배설되는 당분을 취하고자 그렇듯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달콤한 돌무화과의 수액을 얻기 위해 진딧물을 키우는 개미. 개미는 ‘긴 꼬리 기생벌’을 쫓음로써 무화과나무는 좀벌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여왕이 키워낸 열매를 많은 곤충과 짐승들이 나누어 먹기 시작할 때, 그 속의 좀벌 애벌레는 깨어나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태어난 좀벌들 가운데에서 수컷은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고, 오로지 좀벌 여왕벌에게 수정을 한다. 그러고는 남아있는 힘을 다해 그 두툼한 무화과 과육을 물어뜯고 파헤쳐서 출입구를 넓혀 여왕벌의 비행을 돕는 것으로 한 생을 마감한다. 마치 주인댁 마님과 하룻밤 성욕 하나 때문에, 만리 성 쌓는 데에 주인을 대신하여 강제노역 당한 어느 머슴처럼. 사실 ‘하룻밤에 만리 성’은 그런 스토리가 있다. 내 어린 외손주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통할는지는 모르겠으나... . 이때 여왕벌은 본능적으로 무화과 꽃의 가루를 가슴 속 주머니에 곱게곱게 담아서는 수벌이 열어준 그 구멍으로 기어 나와서 또 다른 무화과 꽃을 향해 날아가,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듯, 몸을 그냥 들이 밀 수 없는 그 아주 작은 무화과 열매 구멍에 자신의 내장을 터트리는 고통을 안고 기어들어 알을 낳고 죽음으로써 또 다른 나무여왕을 만든다.

  이후에 나무여왕은 완전히 익은 과일을 기린이, 코끼리가, 원숭이가 먹고 다른 곳으로 제법 멀리 이동을 하여 배설을 하면, 그 배설물에서 싹이 나고 ... 또 숲을 이루고 물에 떨어진 열매는 물고기가 먹고... 새들은 나무구멍에 둥지를 틀고... 포식자들은 나무에 깃들여 사는 여러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모여든다. 나무에서 떨어진 무화과 열매를 강물 속 물고기도 먹고 개미도 먹고 코끼리도 먹고 ... .나무의 여왕 무화과나무는 또 잎을 떨어뜨리며 다음 우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프리카 여왕인 돌무화과의 라이프사이클은 이렇듯 영속한다.

  위와 같은 아프리카 여왕의 이야기를 듣던 외손주녀석 으뜸이. 녀석은 정말 어린아이 같지가 않다.

  “한아버지, 자연은 참으로 신비스럽다? 한아버지 이야기 듣고보니, 아프리카의 돌무화과나무는 많은 생명체의 ‘마더(mother)’가 분명한데? 글고(그리고) 봄이 오면, 한아버지 농장에도 무화과 몇 그루 심으면 어때?”

  고 녀석,정말 기특하다. 하지만, 이곳은 겨울에 너무 추워서 무화과나무의 생육조건이 맞지 않다고 일러준다. 여러 차례 시도해보았으나 실패했다고 덧붙이면서.

  나무난로의 불이 사위어 간다. 이 산골 외딴 농막에는 또 다시 어둠이 내리고.


  작가의 말)

  이 글 시리즈물을, 제 96화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읽지 않은 분들에 대한 특별배려입니다. 나의 큰딸은 집의 나이 서른여섯임에도 아지 미혼입니다. 자연 작중인물 외손주 ‘으뜸’은 아직 이 농막에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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