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그 옛날에

2020.09.19 14:09

정남숙 조회 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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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그 옛날에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무형유산원이 무형유산(無形遺産)이라는 이름으로 옛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있다. 무형문화유산은 전통 문화인 동시에 살아있는 문화로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판소리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해 생활 속에서 주로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傳承)되어온 옛날이야기도 이 범주에 들어 온 것 같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옛날 옛날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 중, 반드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는 말이 뒤따른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내용 중 태반이 호랑이이야기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국토의 2/5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로 불리었다고 한다. 굽이굽이 산골짜기 각 고을마다 어려 있는 호랑이 이야기 중에 재미있는 설화(說話)와 야사,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호랑이 이야기들은 동심(童心)에 꿈을 심어주기 위해 전래되고 있었다. 산 높고 물 맑기로 소문난 우리고향에서 전해 내려온, 호랑이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호랑이와 곶감을 비롯하여 해님 달님과 호랑이형님 등, 재미와 교훈을 주는 많은 호랑이 이야기 속에 ‘진사(進士)호랑이’얘기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진사(進士)호랑이’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밤마다 우리할머니에게 들은 많은 이야기 중 ‘진사호랑이’ 얘기는 나만의 얘기로 남겨두고 내 맘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고을 깊은 산속에 늙은 엄마와 진사아들이 살고 있었다. 엄마가 늙고 병들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애만 태우던 어느 날, 시주를 하러 들른 노승(老僧)은 집안사정을 듣고, 다음날 다시 방문하여 작은 책 하나를 주고 말없이 돌아갔다. 그 책속에는 변신술(變身術)의 비법이 담겨 있었다. 새벽 인시(寅時)에 주문을 읽고 재주를 넘어 호랑이로 변신하여, 산 밑 동네에 내려가 개[犬]을 잡아온 후, 다시 주문을 읽어 사람으로 환원하여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점점건강이 회복되었으나, 그 부인은 새벽마다 이슬에 젖어 들어오는 남편의 행동이 심상치 않아, 하룻밤은 남편의 뒤를 밟아 변신하는 남편을 보고 남편이 숨겨놓은 술법 책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진사아들은 비법책이 없어져 주문을 읽을 수 없어 사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밤마다 개만 잡아다 마당에 던져놓고 호랑이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마을에서는 밤마다 호랑이가 개를 잡아가는 것을 알고,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올무를 설치하여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이 사실을 알고 부인은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진사호랑이의 안전을 위해 밤마다 남편 앞서 길목의 올무를 걷어치워 남편을 도우며 속죄를 했다. 동네사람들은 부인이 올무를 제거하는 것을 알고 곧바로 다시 올무를 설치하여 결국은 진사호랑이가 잡혀 죽었다는 이야기다. 얘기를 들려주신 할머니는, 진사호랑이가 개가 없으면 저녁에 잠잘 때 방문 맨 앞에서 자는 아이들을 개대신 잡아간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앞 다퉈 방문 앞자리를 모면하려고 자리다툼을 했었다. 지금도 우리는 숲이 우거진 산길을 가노라면, 어디선가 진사호랑이가 살아서 나올 것 같아 두리번거릴 때도 있다. 이렇게 호랑이 이야기는 옛날 옛날 그 옛날이 아닌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다.



몇 해 전, 서울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아시아 호랑이 특별전이 열렸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일본에도 호랑이에 관한 전설은 많았다. 우리민족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檀君神話)는 곰과 호랑이로부터 시작되었고, 또한 우리민족은 호랑이를 부리는 군자의 사람들로 일컬어질 만큼 호랑이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에 대한 신앙과 외경심은 고분 미술에서는 수호신으로, 불교미술(佛敎美術)에서는 산신의 정령으로, 회화에서는 군자와 벽사의 상징으로 표출되어왔다. 한국 미술 속 호랑이는 사납게 표호하기보다는 근엄(謹嚴)한 모습이나 해학적(諧謔的)인 미소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모습에는 덕(德)과 인(仁)을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과 낙천적이며 해학적인 한국인의 정서가 투영되어 있다고 봤다.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신통력을 지닌 기백 있는 영물이고 해학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친구였다.



전 세계의 호랑이는 9여 종이 있다고 한다. 주로 동아시아에 분포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국의 얼과 기개를 상징하는 한국의 호랑이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게 했다. 그 바람에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등 한국의 백두대간을 호령하며 다니던 호랑이들은, 1924년 마지막 포획으로 멸종되어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단다. 그렇다고 결코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전설 속 옛 이야기와 민화, 도자기, 속담 등 우리의 생활 속에 호랑이는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고, 앞으로도 천 년 만 년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며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호랑이에 대한 기록들도 많다.

귀신을 잡아먹는 양(陽)의 기운으로/ 가을 깊은 숲속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그 타고난 비범(非凡)과 위엄(威嚴)은 군자의 현현(顯現)이라/ 전쟁과 죽음을 주관하는 백수(百獸)의 우두머리로다/ 군자는 입을 아끼고 호랑이는 발톱을 아낀다.

이런 글귀가 생각난다. 또 호랑이는 썩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大蟲不吃腐肉 중국속담). 양의 몸에 호랑이 가죽을 걸치다(일본속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 같은 속담도 있다. 『도장(道藏)』<심신장(心神章)> 기록에는 “해는 앞에서 달은 뒤에서 지키고(日居於前 月居於後)), 좌청룡 우백호 전후작 후현무(左靑龍右白虎 前朱雀後玄武) 가 있으니 사악함을 물리치고 오래 사는 도이다(卽去邪長生之道也). 이 기록에 기인하여 도읍을 정하는 풍수가 발달한 것 같다.



특히 우리나라 민화에서 빠지지 않는 호랑이 그림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러 상징과 은유를 담아 다양한 호랑이 그림을 그렸다. 호랑이와 용이 짝을 이루는 용호도(龍虎圖)는 영웅이나 왕과 같은 권력의 상징으로 정초의 액막이 그림인 세화(歲畵)로 선호되었다. 호랑이가 산에서 걸어 나오는 출산호도(出山虎圖)는 군자 또는 숨은 선비의 출세를 은유하기도 하며, 18세기에 김홍도로 대표되는 화원화가들은, 정밀(精密)한 사생력으로 위엄 있는 출산호도의 전형을 세우기도 했다. 호랑이가 새끼를 보살피는 유호도(乳虎圖)는 인수(人獸)의 부자지정(父子之情)을 뜻하며,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호작도(虎雀圖)의 지저귀는 새들은, 기쁨의 징조로 번영과 수복강령의 염원을 담은 민화로 크게 유행되기도 했다.



88서울올림픽과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이기도 한 호랑이, 아이들 동화 속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호랑이는 옛날 옛날 그 옛날의 호랑이가 아니다. 현대인은 호랑이를 보기위해 동물원으로 간다. 울타리에 갇혀 야성(野性)이 사라진 호랑이를 구경하는 우리는, 과거의 호랑이에게 품었던 경외와 찬탄, 존경과 두려움을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사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야생의 호랑이를 우리의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신화 속에서 다시 한 번 불러 보고 싶다.

『주역(周易)』(革封)에 대인은 호랑이가 변한 듯하고(大人虎變), 군자는 표범이 변한 듯한다(君子豹變)고 했다. 이 시대의 호랑이 같은 대인을 만나보고 싶다. 옛날 옛날 그 옛날뿐 아니라 지금도 호랑이는 우리의 수호신으로, 다정한 친구로 남아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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