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수필의 유일한 양념은 아니다

2020.10.06 00:38

김학 조회 수:3

재미가 수필의 유일한 양념은 아니다

金 鶴

나는 무려 33년이란 세월을 방송사에서 보냈다. 내 인생의 황금기를 방송과 씨름하다 보낸 셈이다. 내가 정년퇴직을 하기 전에는 프로그램 제작자(PD)의 입장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시청자에게 공급했지만,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은 시청자의 입장에서 텔레비전을 보게 된다. 제작자 시절에는 “이렇게 열성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도 시청자, 당신들이 안 보고 배길 거야?” 하는 오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후배 PD들이여, 내가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보여줄 수 있어?” 하는 심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준다.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방송사에서 PD가 시청자와 실랑이를 하는 것은, 마치 우리 문단에서 수필가(문인)가 독자와 씨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PD는 곧 수필가(문인)요, 시청자는 곧 독자나 같다. 시청자와 독자는 불특정 다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시청자는 전파매체인 텔레비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독자는 활자매체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 취향과 기호가 다르다. 그러니까 텔레비전 시청자가 바로 책의 독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방송사 PD들은 요즘 엄청난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지상파방송인 KBS, MBC, SBS, EBS와의 상호 물고 물리는 시청률경쟁도 벅찬데, 그밖에도 70여 개의 케이블방송과 위성방송까지 가세하니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인터넷방송까지 달려들게 되니 PD들의 어려움이 어떻겠는가? 방송계에서 살아남고 자기 몸값을 높이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하겠는가?

방송사 PD들에 비하면 수필가들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너무 무사안일의 자세에 빠져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다. 수필가들은 독자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더라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수필가의 길을 가려는 오만(傲慢)에 젖어 있다. 방송사가 불어나면 PD들은 엄청난 경쟁에 시달리게 되는데 반해 문예지와 수필전문지가 불어나면 수필가(문인)들은 오히려 발표지면이 넓어져 경쟁률이 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이게 결국 수필의 하향평준화를 부추기는 원흉이 아닌지 모르겠다.

발표지면이 모자라던 옛날에는 작품이 뛰어나야 다음에도, 또 다른 문예지에서도 지면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수필가는 좋은 수필을 써야 살아남는다는 절박한 의식을 가졌었다. 그게 수필문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필수 생존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수필가들에게서 그런 헝그리정신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발표지면의 풍요가 가져다 준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수백 권의 종합문예지와 무려 15가지의 수필전문지에 발표되는 수필을 읽어보면 도토리 키 재기 식의 작품들이 많은 지도 모르겠다. 수필월평을 하는 분들이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뛰어난 수필을 발견하면 광부가 금광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워한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수필은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수필가들은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수필을 쓸 수 있을지 고심하고들 있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다시 텔레비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텔레비전은 대개 해마다 봄․가을 두 번씩 프로그램을 개편한다. 그 이유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활패턴이 달라지는 시청자의 편의를 배려하고, 시청률조사 결과 시청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은 프로그램을 없애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기 위해서다. 그것이 정규 프로그램 개편이고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부분개편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민감한 게 방송사의 편성전략이다. 우리 문단 특히 수필문단에서는 독자를 배려하려는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아니 그런 발상이라도 해보았던가? 텔레비전 PD처럼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멋대로 지면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데 어느 수필가인들 사서 그런 고민을 하려고 하겠는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보면 뉴스, 드라마, 쇼, 교양프로그램, 퀴즈, 개그프로그램, 스포츠 중계 등 다양하다. 그런 유형의 프로그램들을 요일별로 시간대별로 편성하여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시청자의 취향과 선호도가 저마다 다르다는 데 방송사 편성책임자들의 고민이 있다. 뉴스를 좋아하는 시청자,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 퀴즈를 좋아하는 시청자, 개그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시청자, 스포츠를 좋아하는 시청자……. 이들 시청자들의 다양한 요구와 필요를 어떻게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조차도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다.

수필(문학)의 독자도 다를 바 없을 줄 안다. 서정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서사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기쁜 내용의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슬픈 내용의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재미있는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담백한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 이처럼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독자들의 비위를 어떻게 한꺼번에 맞출 수 있겠는가? 일류 요리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방송사에서는 날마다 시청률을 조사한다. 증권시장의 주식시세처럼 시청률도 날마다 변하고 그 결과에 따라 PD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그런데 수필(문학)문단에서는 방송사처럼 독자의 반응을 조사한 적이 있던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그런 애독자 실태조사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주먹구구식이다. 이제 우리 문단에서도 방송사들처럼 독자에 대한 설문조사 등 과학적인 접근을 꾀해볼 일이려니 싶다.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이 비교적 재미가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시청자의 요구가 다양한데 재미를 위하여 모든 프로그램을 개그프로그램이나 드라마로만 편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기 개그맨이나 탤런트를 발굴하여 다른 교양프로그램이나 오락 프로그램의 MC를 맡기고, 프로그램 안에 개그맨들이 잠깐 출연하는 코너를 만들기도 한다. 수필에서도 텔레비전의 이런 방식을 도입해보면 좋을 듯싶다. 재미있는 소재를 만나면 한 편의 재미있는 수필로 만들고, 그렇지 못하면 수필의 한 단락이나 한 문장이라도 재미있는 표현기교를 살려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면 좋겠다.

수필가들이 쓰는 모든 수필에서 다 재미만을 요구해서도 안 될 줄 안다. 수필의 독자들이 모두 수필에서 재미만을 요구하지도 않고, 어느 제재나 다 재미라는 양념을 넣어 수필이라는 요리를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독자가 수필에서 얻고 싶어하는 것은 재미는 물론이요, 유익한 정보, 풍성한 화제, 지적 만족을 주는 교양, 즐거움을 주는 오락, 깨달음과 기쁨을 주는 퀴즈 등 다양할 것이다.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시청자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듯이 수필 한 작품에서 독자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생활주변에서 재미있는 소재를 찾고, 재미있는 표현기법을 개발하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수필가가 쓰는 수필마다 재미있는 수필일 수는 없지만 훗날 한 권의 수필집을 묶을 때에는 재미있는 수필이 사이사이에 끼도록 편집하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 되리라.

메밥과 오곡밥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자. 제삿날 제상에 올릴 때는 흰쌀로 지은 메밥이어야 한다. 아무리 오곡밥이 시각적으로도 보기 좋고 영양가가 높다고 해도 제상에 올릴 수는 없다. 용도와 필요에 따라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에서의 재미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수필에서 재미만이 꼭 필요한 양념은 아니다.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넣으면 시원하지만 담백한 토란국에 고춧가루를 넣으면 그 맛이 어떻게 되겠는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가수나 탤런트, 개그맨들이 뒤섞여 자기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인기를 높이려 노력하듯이 수필에서도 재미 외에도 다채로운 양념들이 저마다 제 구실을 할 때 수필의 참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재미는 수필이 요구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 치 혓바닥으로 단맛, 쓴맛, 매운맛, 짠맛을 느끼며 살지 않던가? 수필의 맛도 그처럼 다양해야 할 것이다.

*김 학 약력/호:三溪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수필아, 고맙다』『하루살이의 꿈』『손가락이 바쁜 시대』 등 수필집 17권/『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등 수필평론집 2권/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역임/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원종린수필문학상 대상 등 다수 수상/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교수 역임,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교수/e-mail: crane43@hanmail.net

http://crane43.kll.co.kr http://blog.daum.net/crane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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