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친구

2020.10.19 13:27

이우철 조회 수:5

단짝 친구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우철

 

 

 

 전화기를 들고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아내가 부러워진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전화를 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 세세한 이야기까지도 “그래그래, 맞아.” “잘했어!” 서로 공감하며 맞장구도 쳐준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사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진심을 주고받으면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가까운 이웃끼리 속내를 털어놓으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스트레스도 말끔히 사라지니 말이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했다. 세월이 빠름을 이르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반세기, 그간 소식도 없던 동창들이 하나둘씩 고향을 왕래하면서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과정도 환경도 다 알 수는 없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 함께 즐거워했다. 유유상종이라 했듯이 각별히 마음이 가는 친구가 있다. 전주 평화동에 사는 고원은 우리집과 불과 10여 분 거리에 살고 있었으니 성향도 비슷해서 단짝친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지필묵(紙筆墨)을 옆에 두고 붓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비록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지만 한학을 많이 하신 조부님 밑에서 초등학교 졸업 이전에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두율효경 등 한학을 두루 섭렵했으니 초․중․고 과정을 불과 9년에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적 기량은 고등학교 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2년때는 시를 쓰며 학생회의 문예부장을 맡아 교지를 만들었고, 시화전도 이끌었다. 학보 편집주간을 맡아 학교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누군가 조금만 밑받침 해 주었더라면 큰 인재가 되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의 분복이려니 싶다. 친구는 지난 7월 자서전 “고원문집”을 발간했다. 8백여 쪽 분량으로 평생동안 모은 시, 산문, 가정의례는 물론 효문화에 이르기까지 후학들이 읽어야할 가례집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흔적과 종가를 이루려는 선대의 발자취도 더듬어 볼 수 있다. 우선 그의 문집에 있는 시 한 편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莫言何經路 살아온 길 어떠냐고 묻지를 마시게

  失杖盲人惶 지팡이 잃은 장님처럼 허둥거렸소

  夜深逢絶璧 깜깜한 밤에 절벽을 만났으니

  唯願免不具 오직 바라기는 불구자 면하기를

 

 생업에 늘 바쁘고 허둥대며 사는데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언제 이처럼 글공부를 하며 대작을 이루었을까? 올곧게 한길을 걸어온 친구에게 박수를 보낸다. 지난 10월 초에는 세 친구(고원, 석담, 우경)가 고향의 자랑인 강천산 모 팬션에서 만났다. 자연히 문집의 내용이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구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글을 통해 알기 마련이다. 글 속에 그의 생각과 흔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와 축하를 보내며 하얀 밤을 지새웠다.

 

  나는 직장을 은퇴한 이후 배우기 시작한 서예와 수필이 심심치 않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평생을 직장에만 매달리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혼자서도 무렴하지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틈이 날 때마다 묵향에 젖어 붓글씨도 쓰며, 지나온 흔적과 생각을 수필로 엮어보기도 한다. 때로는 친구 고원과 만나 담론을 나누며 등산을 즐기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나의 행복한 노후려니 자부하며 산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고, 수필을 쓰며 나의 생각과 흔적이 문자화 되었을 때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누군들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하고싶은 일을 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빈부나 귀천은 하늘의 분복으로 생각할 일이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늘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자고 다짐해본다.

 

 이제 노년에 이르러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는 나이다. 나이가 들면 건강이 제일이란다. 지인들을 만나면 함께 식사할 수 있고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으니 그게 기쁨이다. 여세추이(與世推移)하며 멋지게 살아온 단짝친구를 노년에 만났으니 자주 회우하며 세상담론도 나누며 살아가리라.

                                                                            (202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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