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주년의 행복

2020.10.20 22:23

한성덕 조회 수:19

결혼 40주년의 행복

                                                                                               한성덕




  국어사전에게 행복을 물었더니 ‘복된 좋은 운수나 행운, 또는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이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일러주었다. 내 나름의 행복관은 ‘누가 안겨주든지, 또는 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자기의 행복은 자신이 개척해서 느끼고 사는 것이지만, 실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 애완용의 어떤 동식물, 또는 자연이나 연극 영화로부터 오는 경우다. 그런가하면 성취감에서 오는 행복이나, 소유에 따른 행복, 가진 것을 누리는 것에 대한 행복도 있다.

  10월 9일은 결혼 40주년이다. 그날만큼은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할 이벤트를 생각했었다. 날이 점점 다가오건만, 깜짝 놀라기는커녕 미동도 할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낭만의 하룻밤을 지낸다는 게 어렵고, 재깍재깍 흐르는 시간마저 두려웠다. 왠지, 못난 남자에 못난 남편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진 느낌이었다. 쉰 살에 낳았다는 아내 귀요미를 고생께나 시킨다 싶어서 죄책감마저 들었다. 목회에서 조기에 은퇴하고, 아내의 찬양사역으로 사는데 ‘코로나19’가 그마저 막아버렸다. 7,8개월의 생활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40주년이 사흘 남은 날, 의형제를 맺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맺은 의형제였다. 새끼손가락을 걸거나, 사나이 대 사나이의 굳은 악수를 하거나, 고리타분한 혈서의식은 없었다. 그저 식사한 끼 나누는 것으로 형제의식(?)을 치렀다. 그만큼 마음이 통했다는 게 아닌가? 그 형제가 내 의사를 묻거나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10월 9일은 아내가 쉬는 날이라며 펜션을 구할 테니 하룻밤을 함께 지내자고 했다. 투시로 내 사정을 꿰뚫고 있었나? 나만의 비밀을 들킨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그날이 결혼40주년인데, 어찌할 수 없어 끙끙거린다.’고 실토하는 동안 행복이 확 밀려들었다. 이어서 그 짧은 순간에 선이 굵은 40년의 삶이 제트엔진을 달고 내달렸다.

  충남 웅천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대천시 성주면 성주골의 고즈넉한 산속 아담한 원룸펜션 두 개를 마련했다. 집에서부터 저녁식사차림을 준비해 왔다. 더없이 고마운 것은 신경을 퍽 쓴 흔적이 역력했다. 찬거리에서 시각이 번쩍하더니 촉각은 화들짝, 후각은 벌렁벌렁, 미각은 군침을 돋우며 쩝쩝거렸다. 청각만 합세하면 오감이 아닌가? 간이 맞고 입맛이 착착 당기는 게, 같은 시대에서 자랐다는 동질감이 더 깊어졌다. 펜션주인이 마련해 준 식탁의 숯불에 둘러앉았다. 밤도 굽고 저녁식사도 하고, 사과를 비롯해서 멜론이랑 무화과랑 여러 과일도 있었다. 그날의 이색적인 식탁이 결혼 40주년을 더 빛나게 했다.

  밤이 되자 부부끼리 편이 되어 윷놀이를 했다. 50점에 먼저 도달하면 이기는 숫자놀이였다. 내일의 주전부리로 아이스크림 내기에서 공교롭게도 1:1을 이루었다. 윷놀이에 천정이 들썩들썩하리만큼 웃었다. 아침은 누룽지로 배를 달래고, 점심은 대천 어시장으로 갔다. 박정희 권사님의 단골횟집에서 전어와 우럭을 사고 지정해주는 식당으로 갔다. 점심은 우리가 대접하기로 했는데 잽싸게 고기값을 계산해 버렸다. 이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점잖은 말로 ‘식당에서 또 계산이 있다’는 게 아닌가? 거기서는 고기값의 절반정도에 불과했다. 저녁은 칼국수로 마무리했는데, 비로소 내가 온전한 대접을 했다.

  이 같은 결혼기념일이 언제 또 있었던가? 우리의 ‘의형제 사랑’이 결혼40주년에서 더욱 빛났다. 아내가 정말로 좋아했으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을 만끽했다. 나이 들어 사귄 친구가 의형제를 맺자는 게 이때를 위한 것이었나? 친구부부의 진정어린 마음, 그 고마움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2020. 10. 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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