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2020.10.23 14:02

변해명 조회 수:18

편지 / 변해명

육필로 써 보내는 편지에선 그 사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편지 겉봉만 보아도 그리움이 피어나고, 목소리가 떠오르고, 그 사람의 체취를 느끼게 된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읽는 순간 반가움과 고마움에 가슴이 떨리고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고 안부를 보내준 것에 대해서 친근감과 그 정성에 감동한다.

우리 집 우편함에는 날마다 우편물이 담긴다. 서적, 고지서, 안내서, 광고물 등 참으로 다양한 내용의 우편물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육필로 씌어진 편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사춘기 소녀도 20대의 청춘도 없으니 연애편지가 날아올 리 없고, 인기 있는 연예인도 없으니 화려한 엽서가 날아올 리 없다. 그래도 나는 편지함을 열 때면 육필로 씌어진 편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편지를 보낼 사람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나는 열여섯 살 때부터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 중에는 내 편지가 아니고 남의 편지를 대필해준 편지들도 있었다.

6·25동란으로 시골 외가에 살고 있을 때, 한글을 모르는 시골 아낙네들이 많아서 중학생인 내가 야학을 연 일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기억에 없지만 꼬마 선생이란 별명을 달고 밤마다 등잔불 아래서 한글을 가르쳤다. 그때 내게서 한글을 배우던 여인들은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군에서 오는 편지를 읽을 수가 없어 답답하고 또 그에게 답장을 써야 하는 일이 난감한 여인들이었다. 나는 그녀들이 내미는 편지를 큰 소리로 읽어주었고, 그 편지의 답장을 써 주어야 했다. 온갖 묘사와 수식어를 다 동원하고 편지를 써주면 자신의 마음을 대신해서 써 내려간 문장에 감격하고 그 글을 자신이 쓴 편지로 일선으로 보냈다. 그렇게 해서 띄워진 편지는 그녀의 남편이나 애인의 마음에 위로를 주었던 것 같다.

때로는 내가 쓴 편지 글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베껴 보내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민망스러운 추억이지만 그 때 무슨 말로 사지를 헤매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달해 주었는지.

나는 그런 편지를 쓰려고 많은 연애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베끼거나 외웠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지드의 '좁은 문' 그리고 바이론과 베르랜느의 시 등 많은 책들을 읽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크리스마스가 임박하면 학생들에게 국군장병에게 편지를 쓰게 했는데, 담임이었던 나는 학생들이 편지를 쓸 동안 나도 써서 가명의 학생으로 함께 보내고는 했다. 그 가명의 학생 편지에 답장이 왔다. 나는 다시 그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지만 계속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한두 번으로 편지를 더 쓰지 않았다.

그 이듬해 5월 어느 날이었다. 소위 계급을 단 군인이 학교를 찾아와서 아무개 오빠 되는 사람인데 그 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없는 학생의 오빠라니. 나는 그가, 내가 만든 학생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써 온 군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미안함으로 진정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학생은 3월에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갔다고 했다. 만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 가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편지는 그리운 사람을 더욱 그립게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더욱 보고 싶게 한다.

내가 편지 쓰기를 즐겼던 것은 연애편지를 대필한 데도 있지만 중학교 때 은사님이 내게 주신 편지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로메 여사에게 3천통의 편지를 남긴 릴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게 백여 통의 편지를 주신 선생님. 나는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문학의 세계에 눈을 떴고, 편지 쓰는 기쁨으로 온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 편지 쓰기는 내 문장수업의 과외시간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님은 많은 시를 써 보내주시면서 그 시들을 외우게 했고, 글을 쓰게 했다. 하지만 '너는 문인이 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문학의 길이란 외롭고 험난한 길이니 문학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거라.' 하는 글을 주시기도 하셨다.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체험의 목소리가 그 말속에 담겨 있음을 오래도록 깨달아 가는 것이다.

쓰고 찢고, 또 쓰기를 밤새워 하며 한 통의 편지에 자신의 전부를 담아내려고 애를 쓰던 시절, 하지만 내가 쓰는 편지에는 내 마음과 목소리가 담기기보다 자신의 약점은 숨기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 과장하고 남의 것을 내 것처럼 각색된 내용으로 채웠을 것이다. 잘난 척 멋을 부리려던 그 글들을 선생님은 미소로 받아보셨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의 성장을 불안하게 지켜보시던 선생님은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다. 내가 다시 선생님께 글을 쓸 수 있다면 진정 내 목소리가 담긴, 어리석은 내 모습을 허둥대며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렸을 터인데……

우리가 잊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인정의 가교는 편지만한 것이 또 있을까?

누군가 나를 생각하며 써 보내는 편지. 그 편지를 받고 싶어 나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육필로 씌어진 편지에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고 그렇게 해서 보내는 편지는 아니지만 육필 편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아쉽지만 번개처럼 날아가는 편지를 쓰려는 것이다.

(창작수필 2002 가을호) ♣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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