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대의 사랑

2020.10.27 02:50

하광호 조회 수:8

지주대의 사랑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하광호

 

 

 마당에 감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엊저녁에 바람이 많이 불었나보다. 가을이 우리 집 감나무와 대추나무에도 열렸다. 홍시가 눈을 유혹하고 대추볼이 붉어졌다. 고추와 호박은 토방에 널려있다. 가을엔 파란 하늘이 내 마음까지 파랗게 물들였다. 오늘은 그동안 가꾸어 온 밭을 정리하기로 했다. 밭에는 종족번식을 마치고 여유로움도 없이 환경에 억압되어 일생을 다한 지주대에 묶인 고추, 가지, 토마토 줄기들이 힘없이 묶여 쓰러졌다. 지난 밤 찬 서리에 얻어맞고 신음하고 있다. 잡풀들도 그렇게 귀찮게 굴더니 지금은 백발이 되어 힘없이 나뒹굴고 있다.

 

 봄부터 묘가 우리 집에 시집와 이곳에서 뿌리내려 새 삶을 꾸렸지만 각종 병·해충에 시달리고 올해는 긴 장마에 애를 먹었다. 주인이 거름과 비료를 주어 그동안 건강한 몸으로 탈 없이 자랐지만 태풍으로 인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나마 주인이 받쳐준 지주대 덕분으로 넘어지지 않고 꿋꿋이 자라 자식번성을 위해 열매를 주인에게 맡겼다. 그동안 허리 안 굽고 잘 지냈는데 찬 서리에 온몸이 비실비실하니 절기와 나이에는 굽어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밭가에서는 우두커니 서있는 지주대만 보였다. 오늘은 생명을 다한 고춧대를 뽑고 지주대를 뽑아 정자 밑에 넣어 보관하기로 했다. 지주대 뽑는 작업을 하는데  까치들이 하나둘 다가와 주변을 배회한다. 친구가 되어 일을 하니 외롭지 않아 좋았다. 지주대를 뽑아 한 아름 안고서 옮기니 어머니 생각에 울컥했다. 생전에 이곳에서 생계를 위해 고구마도 심고 콩과 참깨도 심었다. 어머니는 작물을 가꾸기 위해 이곳에서 자주 일을 하셨다. 지주대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지주대는 어머니의 역할이었다. 내가 태어나 어머니가 안 계시면 어떻게 혼자 자랄 수 있었을까?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와도 어머니의 말없는 지주대의 역할에 오늘의 내가 있지 않은가?

 

 이것저것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내가 자랄 때는 무척 어려웠다방과후에는 소꼴을 베고 휴일에는 나무를 한 짐씩 해왔다. 행낭채에 땔나무가 가득 있어야 마음이 훈훈했다. 저녁에는 소죽도 끓이고 군불도 지펴 온돌방이 따뜻했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열심히 공부하여 공무원 되기를 원했다. 70년대 초 새마을사업과 소득증대 일환으로 퇴비증산에 힘을 쏟을 때였다. 매일 퇴비 독려차 마을에 오는 공무원들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그때는 소 키우는 것이 유일한 부를 이루는 때였다. 돼지도 키워 새끼를 팔러 진안시장에 따라 가곤 했었다.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던 일병 때의 일이다. 어머니와 형님이 면회를 오셨다.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오시고 아들을 보고 싶었다며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늦둥이로 태어나 군대에 갔으니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때 문산읍에서 1박 했던 일이 생생하다. 탄약저장고에 보초 설 때마다 부대 밖 통일로는 관광차가 줄줄이 지나가곤 했기에 고향생각이 물씬 나곤 했었다.

 

 오늘 작물을 지탱해주고 받침역할을 하는 지주대에 힘을 얻어 씨받이 역할을 잘해 후손을 퍼트리는 것을 얼마나 좋아할까? 주인은 풍년이 되니 좋아할 것게 당연하리라. 내년에도 지주대의 사랑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지주대 역할이 남다르셨다. 넘어지지 않도록 끈끈한 사랑을 주셨으니 말이다.

 석양에 비치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무심결에 일상에서 가끔 기억이 떠오르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 때를 지금 불러들여 현재를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삶이려니 싶다

 

                                                                                        《2020.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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