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있었기에

2020.11.14 00:31

김순길 조회 수:6

「그날」이 있었기에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 순 길

 

 

 

 나에게는 드라마틱한 추억이 하나 있다. 간직하고픈 좋은 추억들도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어 가지만, 반백(半白)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해온 소중한 추억이다. 더욱이 단풍이 곱게 물들고 낙엽이 지는 낭만의 계절이 오면 그날의 추억은 더욱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50여 년 전, 나는 월남 참전 후 귀국하여 육군 만기 전역을 했다. 그때는 20대 중반으로 사회구성원이 되어 인생의 좌표를 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월남전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군 전역의 해방감에 젖은 나는 매일 같이 술타령에 방황의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방황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염려와 충고를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원치 않았던 공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공무원 공채시험 합격 후 첫 발령지는 정읍군(현 정읍시) 이평면사무소였다. 이때부터 나의 고달픈 공직 인생은 시작되었다. 당시는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새벽에는 퇴비증산 독려, 낮에는 새마을사업현장 근무, 밤에는 사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하루하루가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힘든 시기였다.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하숙집 좁은 방에 누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신세를 한탄하고, ‘내일은 그동안 미뤄오던 사표를 꼭 제출해야지!’ 하며 잠이 들곤 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때론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나의 힘든 공직 생활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나아졌다. 주민들과 좋은 관계도 형성되고, 업무처리능력도 향상되면서 상사에게 능력도 인정받으며 안정감을 찾아갈 즈음, 군 인사발령에 따라서 타 면에서 우리 면으로 보건직 여성 공무원이 전입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 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베이지색 재킷을 입은 밝은 모습을 한 그녀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녀가 전입해온 지 1년이 지난 어느 봄날 토요일 오후, 우리는 동료직원의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되어서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얼마쯤 지나자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구척장신(九尺長身)J선배가 ‘이제 다 먹었으면 슬슬 시작해보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료직원들이 준비된 밧줄로 나와 그녀의 발목을 꽁꽁 묶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몸부림을 치며, 저항을 해봤지만 한순간에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어서 꼼짝없이 묶이고 말았다. 그런 후에는 발바닥을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아팠다. 그녀와 나는 영문을 몰라서 왜 이러느냐고 소리쳤고, 직원들은 둘이 사귀면 풀어주겠다며 어깃장을 놓았다. 오래 전부터 전 직원이 관심 있게 우리를 지켜봤는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그녀와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냐며 화를 내기도 하고, 풀어달라고 통사정도 했으나 발바닥만 더 세차게 두들겨 맞아서 고통만 더할 뿐 전혀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와 나는 ‘오늘부터 사귀겠다.’라고 크게 외치고 나서야 겨우 밧줄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나는 그 사건 후에 그녀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었다. 그녀가 출근하지 않거나 잠시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 하며 확인을 하는 등 그녀에게 동료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봄날의 추억도 이렇게 지나가고 낙엽이 지는 가을이 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으로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타 면으로 떠나게 되었다. 공직 인생은 이렇게 종이 한 장(인사발령장)으로 정들었던 근무지와 사람들을 떠나야 했다. 인자하고 따뜻하신 성품의 B면장은 그녀의 발령을 몸시 아쉬워하면서 주말에 12일 일정으로 내장산에서 송별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많은 직원들이 오고갔지만 이렇게 파격적인 송별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단풍의 명산인 내장산의 늦가을은 낙엽이 떨어져 쓸쓸함도 있지만, 오히려 낭만적인 정취가 있어서 찾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특히 밤이 되어 환하게 떠오르는 보름달은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하듯이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직원들과의 즐겁고 아쉬운 송별 잔치가 끝나고 그녀와 나는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미뤄왔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이 깊어졌음을 느꼈고, 1년 전 직원들에게 발목이 묶여서 당했던 억지 약속 대신 진심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을 갖기로 했다. 때마침 환하게 비춰주는 보름달이 우리 약조의 증인이 되어 앞날을 축복해주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 후 1년이 지난 뒤 우리는 부부가 되었고, 지금까지 지난(至難)한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든든한 동반자로서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은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크게 달라진다. 그만큼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 가치관이나 습관, 행동이 바뀔 수 있으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50여 년 전 힘들고 지친 나에게 사랑을 싹트게 한 그녀지금도 변함없이 내 곁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아내나는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녀와 내가 ‘우리’로 하나가 되는 인연을 만들어 준 「그날」의 추억을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련다.

                                                           

                              (202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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