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철이 들고 보니

2020.11.18 17:08

박제철 조회 수:57

이제야 철이 들고 보니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박제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월드컵 경기장이 있고 그 주변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허리가 기억자로 구부러진 할머니가 보행보조기를 앞세우고 산책을 나오셨는지, 아니면 허리가 더 구부러지면 안 되겠다 싶어 운동을 하러 나오셨는지 가다 쉬고 가다 쉬기를 반복하셨다. 힘들 때는 보조기를 세우고 아예 보조기에 아기처럼 앉아 쉬기도 했다.

 

 젊은 부부가 배드민턴을 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하더니 보조기를 앞세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시 멈춰선 곳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나와서 즐겁게 놀고 있는 곳이었다. 아빠가 비눗방울을 만들어 허공에 날리면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잡으려고 깔깔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젊은 엄마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동영상을 찍어댔다.

 

 할머니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시고 혼자사신 지 20여 년이 되었다고 했다. 아들딸이 있지만 잘 오지도 않는다며 죽는 것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해 억지로 산다고 했다.

  “할머니, 살고 싶지 않다면서 운동은 왜 나오셨어요?

  “이렇게라도 나와서 애기들 노는 것도 보고 바람도 쐬면 그때만큼은 근심도 없고 죽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서 이렇게 나와 운동도 하고 구경을 다니고 있소.

  “아들딸이 잘 오지도 않는다면서 원망도 안돼요?

  “자기들 살기도 바쁘고 힘들 텐데 무엇하러 자주 오겠어?

 

그 할머니를 통해서 내 어머니의 생전 모습과 내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쩌면 유모차 할머니와 비슷한 동년배쯤 될 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일제강점기 속에서 젊음을 보냈다.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추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를 했다고 하셨다. 일본 노무자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간 남편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살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때 모든 것을 잃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는 아들딸 칠남매를 데리고 굶어 죽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가? 농사를 짓고자 새벽별을 보고 나가 초저녁별을 보고 들어오시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나는 무었을 했던가? 전주에서 어머니 계신 곳이 얼마나 멀다고 자주 가보지도 못하고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등 특별한 날이나 손자들을 앞세우고 갔었다. 대문 앞까지 뛰어나오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이것도 효도로구나 생각했었다. 어머니도 그 할머니가 자식을 원망하지 않듯 그런 나를 원망하지 않았을 성싶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한의 자비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자식과 손자를 두다보니 이제야 철이 드는 성싶다. 소슬바람이 낙엽을 굴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버이 살아 계실 제 섬기기를 다 하여라/ 지나고 난 이후 애달프다 어이 하리/ 일평생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선생의  훈민가를 속삭여주며 그 낙엽들은 바람 따라 날아가 버렸다. 그 속삭임의 의미를 철이 들고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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