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길

2020.11.23 12:21

구연식 조회 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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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수필의 글감으로 가장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은 '낯선 것'이라고 한다. 낯선 길이든 익숙한 길이든 길의 주인은 걷는 사람이다. 그래서 길에서 얻는 것은 주인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야외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각은 햇빛이 영화관 스크린처럼 약간 대각선 위에서 비치는 오후 2~3시쯤 햇빛을 등지고 바라볼 때이다. 수필대학에서 수업을 마치고 위의 두 가지를 충족할 곳을 경유하여 익산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전북 익산지역에서 낳고 자라서 남쪽 지역은 좀처럼 와보지 않은 지역이 많다. 임실군 관촌면 시장통 로터리를 돌아서 잿빛 갈대꽃과 은빛 가루가 튀어 오르는 섬진강을 오른쪽에 끼고 난생 처음 무작정 진안, 마령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시골길이라 교통량도 아주 적어서 조수석에는 작은 노트를, 오른손에는 볼펜이 준비되어 있어 눈과 마음이 스케치한 것을 기록하면서 우측 깜빡이를 계속 넣고 저속으로 가고 있었다. 얼핏 보면 국가기관에서 환경조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지나가는 차들이 일부러 고개를 내밀어 힐끗 쳐다보곤 했다.



사선대 조금 위에는 어로(魚路)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미 만들어 놓은 어로로 물고기들이 안간힘을 다하여 올라오고 있는데, 백로 한 마리가 물총질을 계속하면서 물고기를 잡아먹노라 이골이 났다. 당국이 어로 공사를 하는 것은 백로 먹이 장소가 아니고 물고기를 보호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을 텐데, 백로가 얄미워서 차를 세워놓고 돌 팔메질과 소리를 쳐서 날려 보냈다. 그런데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날 잡아보라면서 도로 앉아서 물총질을 계속했다. 인간사회에서 범죄자와 경찰과의 숨바꼭질처럼 느껴졌다.



시골길을 계속 올라가니 유난히 초등학교 폐교가 많이도 보였다. 학교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가 들릴 것 같고, 운동장에는 뽀얀 먼지를 내면서 어린이들이 뛰노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옛날부터 인구는 국력이라 했다. 한 국가가 외국과의 무역 의존 없이 일정 기간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 인구는 1억 명 이상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인구에 계속 감소하고 있으니 이 땅의 후손들이 염려된다. 특히 농촌인구는 계속 줄어가는데 도둑들은 증가하는지 갈림길마다 방범 카메라는 500여m가 멀다 하고 부릅뜬 올빼미 눈으로 지키고 있어 또 다른 세태의 뒷골목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진안 쪽에 가까울수록 산야에 단풍이 확연하다. 햇빛에 비친 산자락의 단풍은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차창을 밀어내면서 새로운 풍광을 보여주었다. 가로수는 회화나무가 대부분이었는데 벌써 단풍옷을 벗어 던지고 가지는 싸리비처럼 쳐들고 함박눈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은 낙엽들이 길 위에 납작 엎드려 있더니 자동차가 지나갈 때 바람이 일어나면 장마철에 두꺼비 떼처럼 폴짝 뛰어서 조금씩 이동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오른쪽 마령을 끼고 돌아가니 진안의 랜드마크인 말귀(馬耳)가 죽순처럼 뾰족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이산 봉우리가 흔전만전한 중국 계림지역에서는 별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진안의 마이산은 유독 하나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가 보다. 다이아몬드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빵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나 빵보다 다이아몬드 값이 비싼 것은 희귀성 때문이다. 쓸데없이 우리의 마이산을 평가 절하하고 있다. ‘마이산아 미안해 내가 주책을 떨어서 계림의 마이산을 보다 진안의 마이산은 질이 다른 산이지’ 사과하면서 진안을 뒤로하고 떠났다.



자동차는 그 유명한 모래재를 끙끙거리며 기어오르더니 정상에서 후유하고 긴 호흡으로 가다듬고 쉬었다. 뒤에서 누가 미는 것처럼, 내려갈 때는 힘 안 들이고 스르르 내려간다. 가는 길에 송광사로 가기로 했다. 벚꽃철에는 개미새끼도 끼어들 틈 없이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더니 지금은 한적하다 못해 쓸쓸하다. 벚나무들은 불에 그슬린 거죽처럼 시커멓게 변했고, 군데군데 상처를 치료한 물질로 땜질을 하고 서 있다. 벚꽃이 왕성한 계절을 생각하니 무대 앞에서 찬란했던 배우의 분장 모습과 막이 내려 화장을 지우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 배우의 모습으로 오버랩되어 사라진다.



익산 들녘을 지나 학교에 돌아와서 간단한 점검과 밀린 결재를 마치고 자동차는 낯선 길이 아닌 어느 길에는 작업 차량에서 떨어진 장화 한 짝이 여름부터 있었고, 모악산 길모퉁이에는 불쌍한 고라니 새끼 한 마리가 언덕을 기어오르지 못하고 차에 치어 죽어서 이제는 가죽의 털만 남아 있는 곳도 손바닥 보듯 기억하는 익숙한 길을 가고 있다.



오늘 내가 낯선 길에서 본 것들은 우물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또 다른 세상을 본 개구리 같다. 스페인의 미술가 피카소는 입체파로 유명하다. 피카소는 전·후 좌·우 그리고 상·하에서 본 피사체를 잘 짜맞추어 표현하고 있다. 오늘 낯선 길에서 그간 모르고 살았던 구석진 곳을 볼 수 있어서 나도 입체파 그림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다.

(20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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