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한 번째 생일

2020.11.23 15:49

정석곤 조회 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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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한 번째 생일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정석곤







음력 9월도 눈썹 모양을 닮은 초승달이 반달을 지나 둥근달로 가득 찼다. 내 생일날인 열엿새 날 달도 보름달처럼 밤하늘과 대지를 비추었다. 보름날보다 하루 늦은 열엿새에 태어 난 게 복이 많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거리엔 은행나무가 양쪽으로 줄을 서서 가을 장식을 독차지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녹색 잎부터 노란 잎을 매달고 가을바람과 같이 내 생일을 축제로 만들고 있다. 은행나무는 코로나 19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햇빛을 받아 반들거린 노란 잎을 하나둘셋 떨어뜨리며 일흔한 번째 내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올핸 음력으로 사월에 공달이 들어있다. 내 생일은 예년보다 늦어 11월 1일이다. 해마다 생일을 앞당긴 토요일에 대가족이 모여 축하를 해주었다. 올해도 두 아들네가 10월의 마지막 날에 내려온다고 보름 전부터 예고를 했다. 며칠 고민하다 내려오지 말라고 아내는 전화를 하고 나는 카카오톡 문자를 보냈다. 수도권에서 코로나19가 더 극성을 부린데다 전주에서 막둥이 아들 손자 태건泰建이 돌잔치를 해서 두주 만에 또 만나게 되니까 절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음 한 쪽이 빌 것 같아 코로나19에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생일날 아침이다. 둘째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오늘 더 행복한 날 되세요.”

아내가 전복 쇠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아내가 축하기도를 하고 미역국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었다. 둘째며느리는 선물을 보내고 낮에 축하 전화를 했다. 손자 이현이와 채운이도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했다. 채운이가 중학생이 되어서인지 변성기가 와 굵고 억양이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니까 장하기도 했다.



엊그제 전주에 사는 큰아들네가 생일날 저녁 음식점이 아니라 집으로 초대를 했다. 지난 번 많은 공사비를 들여 아파트의 여러 부분을 개축하고서 초대했을 때처럼 음식을 배달해 먹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며느리가 직접 조리한 음식이었다. 잡곡을 넣은 현미밥에다 국은 낙지연포탕이었다. 반찬은 김치, 굴전, 오리고기 무침을 비롯한 여러 가지였다. 게다가 프라이팬frypan에 즉석에서 돼지 삼겹살까지 구워 된장에 싸먹도록 했다. 손주 슬우와 슬아가 차린 밥상은 진수성찬이 아닌가?



아들이 하나님께 생일축하기도를 드렸다. 저녁 같으면 소처럼 위가 네 개이길 욕심도 부렸다. 내가 국을 좋아한 줄 알고 특별차림으로 끓인 낙지연포탕이다. 국물이 시원해 좋았다. 낙지와 모시조개에다 같이 넣은 전복, 왕새우, 한우고기에 버섯까지 먹었다. 아내는 간도 딱 맞고 맛있게 끓였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밥은 절반을 덜었다. 정성을 다해 준비한 음식이라 골고루 맛을 느끼며 꼭꼭 씹어 먹었다.




밥을 먹다가 약속대로 막둥이네와 카카오톡 화상전화를 했다. 가족이 다 나왔다. 손주 태산이와 태아가 다투며 할아버지 생신축하해요 라고 크게 부르짖었다. 갓 돌을 지난 태건이도 질세라 고함을 질러대 시끌벅적했다. 며느리가 정감어린 말로 축하마무리를 했다. 아들은 뒤에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웃고만 있었다. 전화통화가 소화제가 돼 음식은 더 맛이 있었다. 배가 부를망정 식사 뒤에 나온 키위와 참외 맛은 꿀맛이었다.


차를 마시고 나니 생일축하 케이크가 등장했다. 손뼉을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마음껏 축하를 받으며 촛불을 껐다.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끝나려니 싶었는데 슬우가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주었다. 슬아는 실용적이라 좋은 글을 잘 쓰라고 멀티큐브와 서너 가지가 든 선물 꾸러미를 ‘할아버지, 생신을 축하합니다. 만수무강하세요.’ 라 쓴 엽서랑 건네주었다. 며느리도 선물을 내밀었다.



추석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이 오가곤 한다.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흔한 번째 생일만 같아라.’ 말하고 싶었다. 코로라19로 대가족이 다 못 모여 거리는 멀었지만, 자녀와 손주들의 효심孝心만은 여느 생일보다 깊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듯 가족 관계는 장애물이 가로 놓였더라도 다른 어떤 대인 관계보다 깊고 강하다는 걸 느낀 하루였다. 대가족이 다 모이지 못한 일흔한 번째 생일잔치였다. 하지만 즐겁고 감동적인 생일이었다.

(2020. 11. 1.)



※ 공空달 : 날짜상의 계절과 실제의 계절이 어긋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달. 윤달이라고도 함

※ 멀티큐브multicube : 여섯 개의 정육면체로 된 다용도 연필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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