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인 수필집 발문

2020.11.23 22:55

김학 조회 수:10

<백남인 수필집 발문>

노 교육자가 수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만사(世上萬事)

-桃園 백남인 수필가의 첫 수필집 『삶, 그 무늬들』출간에 부쳐-

三溪 金 鶴(수필가, 신아문예대학 지도교수)


1. 桃園 백남인의 살아온 길

수필가 도원 백남인은 1937년 10월 8일 정읍시 감곡면 대신리 풍촌마을에서 수원백씨인 아버지 백낙홍과 부안김씨인 어머니 김정순의 3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인 당시 사회분위기 탓으로 한학자이신 아버지는 객지에 나가 사업을 했으나 실패한 뒤 유지들이 차려준 서당에서 제자들을 모아 한문과 서예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친정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며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외가마을에서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간 탓으로 어린 시절엔 힘들게 살았다. 일가친척과 떨어져 사노라니 어려움이 많았다. 도원 백남인은 어머니 나이 30대 후반에 늦둥이로 태어난 탓으로 몸이 약하여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우며 자랐다.

도원 백남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한국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3년 남짓 작은형님의 방앗간에서 일을 도와주며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진학의 꿈을 버리지 않고 공부를 하여 1953년엔 태인중학교에 입학했고, 1956년엔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하여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59년엔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평생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영광스럽게도 교감, 교장을 거쳐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도원 백남인은 정읍 입암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장흥고씨 집안의 규슈 고정숙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만 넷을 낳았다. 네 아들은 잘 자라서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원 백남인은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정읍시내 여러 학교에서 숱한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50대에 이르러 관리자 자격을 얻어 교감, 교장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교직을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2. 桃園 백남인과 수필의 만남

도원 백남인은 정년퇴임 뒤부터 재직 중에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취미활동과 봉사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도원 백남인은 교단에 있을 때부터 독서에 관심이 많았고, 또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여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그걸 눈여겨 본 후배들이 정년퇴직을 한 도원에게 수필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뒤늦게 수필을 만나게 되었다.

3년 전인 1997년부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에 등록하여 수필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드디어 2019년 계간 종합문예지『표현』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여 당당히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팔순의 나이에 수필과 사랑에 빠지더니 드디어 첫 수필집『삶, 그 무늬들』이란 옥동자를 낳게 되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보통사람이라면 절필할 나이에 수필을 만나 이렇게 수필집까지 출간했으니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도원 백남인은 2018년 정읍수필문학회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수필의 길을 힘차게 걷고 있어 믿음직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면 좋을 것 같다.

70대 중반에 수필을 만나 매주 한 편의 수필을 써서 해마다 한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더니 어느새 9권의 수필집을 펴낸 전주사범학교 선배 김길남 어르신을 본받아 보라고 권하고 싶다.

3. 桃園 백남인의 수필 들여다보기

桃園 백남인이 수필을 만난 지 3년 만에 이렇게 첫 수필집을 출간하게 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써놓은 수필 50여 편으로 수필집을 묶기로 한 것은 문우들의 권유에 힘입은 일이다. 80대 중반인 연세를 생각하라며 후배들이 수필집 상재를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도원 백남인은 첫 수필집 『삶, 그 무늬들』에서 50여 편의 수필을 6부로 나누어 편집했다. 각 부에서 수필 한 편씩을 맛보기로 소개할까 한다.

桃園 백남인은 『삶, 그 무늬들』이란 첫 수필집 머리글에서 ‘써놓은 글을 세상에 내놓기는 아직 부족하여 망설이고만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한정 미루기만 하다가는 컴퓨터 한 구석에서 묵혀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내놓으려니 부족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라고 쓰고 있다. 누구나 첫 수필집을 낼 때는 이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제 도원 백남인의 수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1부 「인생충전」에서는 맨 처음에 편집된 「나와 명심보감」이 눈길을 끌어 살펴보았다.

6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3년 동안이나 학교에 다니지 못한 백남인이 어머니를 따라 5일장인 신태인 장에 갔다가 서점에 들러『지능고사』(지금의 전과지도서)와『명심보감』을 샀다. 이 두 권의 책은 도원 백남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었다. 농사꾼으로 살게 될지도 모르는 백남인이 이 두 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명심보감은 교직생활을 하는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짧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인생지침이 명확하여 개인과 가정 및 직장과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금언명구가 되었다. 인간 본연의 도리로서의 선행과 효행을 비롯하여 근면성실, 자아반성 등 스스로 자기관리를 성실하게 함은 물론, 배려와 인간존중 등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현명하게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도 구구절절이 지침이 되어 주었다.

「명심보감」중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가이드북이나 다름없는 『명심보감』은 인간 백남인을 참교육자로 키우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던 책이다. 도원 백남인은 칠판의 한쪽 구석에 명심보감의 한 구절을 써놓고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그것을 노트에 적고 일기장에 옮겨 쓴 학생들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명심보감은 백남인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던가?

제2부 「나의 애마」에서는 8편의 수필 중 「나의 술 이력서」가 눈길을 끌었다. 평소 애주가가 아닌 분이 쓴 수필이기 때문이다.

“술도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건배사야?”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술을 못 마셔도 좌중에서 최 연장자이다 보니 떠밀려서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읊은 권주가라고나 할까?

지금은 건강상 어쩔 수 없이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옛날에는 술로 인하여 실수도 많이 했고, 건강도 많이 해쳤다. 나의 체질이 워낙 약해서 처음부터 술을 멀리 했어야 했는데, 젊은 시절엔 겁도 없이 술자리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나의 술 이력서」중에서

수필은 마음의 예술이다. 그 마음은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 같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화가라면, 문자로 표현하는 게 수필가다. 수필을 써보면 그 마음의 색깔을 알 수 있다. 마음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게 수필이다.

도원 백남인은 수필과 사랑을 나누면서부터 매사를 허투루 보지 않는다. 소재 찾기 습관이 그를 그렇게 변모시킨 것이다. 또 한 편의 수필을 읽어보자.

사람들은 숫자의 홍수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밥 먹고 출근하고 몇 시에 귀가하는 등 하루 일과가 숫자로 이뤄진다. 그뿐인가? 전화번호, 차량번호,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은행 계좌번호, 등 숫자와 관련이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숫자, 예를 들면 1, 3, 5, 7, 10, 12, 90, 100과 같은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1등, 100점 등 최상이나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쩐지 안정감이 느껴지는 3, 5, 10, 12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7과 같은 행운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는 사람, 90처럼 희망을 비춰주는 숫자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런가 하면 싫어하는 숫자도 있다. 예를 들면 4, 13과 같은 숫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4’는 ‘죽을사(死)’자를 떠올려 기분 나빠하는 사람, ‘13’은 어느 종교와 관련지어 막연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내 생활 속의 숫자」서두

그렇다 사람은 숫자에 포위되어 살고 있다. 스마트폰 번호도 숫자요,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도 숫자가 아닌가? 필요한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다.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도원 백남인은 팔순에 접어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체험을 했을 것인가? 그가 겪어온 갖가지 체험은 모두가 좋은 글감이 될 것이다.

제3부 「이름 때문에 생긴 일」에서는 다양한 제목이 눈길을 끌지만 표제로 삼은 「이름 때문에 생긴 일」이 특히 공감을 자아낸다.

미국의 수필가 E. B. 화이트는 ‘글은 인류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원 백남인의 수필은 화이트의 가르침에 딱 어울린다. 이 작품만 해도 그렇다.

나의 모교에 성실하고 유능하신 교감선생님이 계셨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그 교감선생님은 늘 손에 망치를 들고 다니며 고장 난 시설물이나 교구들을 보수하셨다. 어느 날 학교를 찾아온 손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성은 ‘마’씨고 이름이 ‘치장’이신 교감선생님은 ‘마치장입니다’라고 인사를 나눈 뒤 손님을 교장실로 안내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볼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손님은 조금 전에 친절을 베풀어준 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쟁이, 참 고마웠소. 잘 있어요.” 했다. 교감선생님을 망치 들고 다니면서 일하는 기능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이름 때문에 생긴 일」 중에서

이름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는 많을 것이다. 도원 백남인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이런 체험담을 또 소개했다.

어느 해 새 학기를 맞아 학급담임을 배정하는데, 새로 전입해 오신 두 분의 이름만 보고 L금순 선생님은 남자반 담임으로 예정해 놓았는데, 첫 출근을 하여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는 선생님의 성명을 들으신 교장선생님은 ‘L금순’ 선생님이 남자선생님이고, ‘L종안’ 선생님이 여자선생임을 확인하시고는 부랴부랴 학금담임배정을 바꾸어 발표한 일도 있었다.

「이름 때문에 생긴 일」중에서

사회생활을 하노라면 어찌 이름 때문에 생긴 일들이 이뿐이겠는가? 이밖에도 포복졸도할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요,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했다. 도원 백남인은 80고개를 넘었는데도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과 독서에서 수필의 소재를 잘 찾는다.

제4부「추억의 가요무대」에는 그렇게 찾은 글감으로 쓴 글들이 몇 편 있다. 수필은 독자를 의식하면서 써야 하는 글이다. 독자의 관심을 끌려면 다음 네 가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 독자의 관심을 어떻게 끌어 모을까?

둘째, 시작부터 끝까지 독자의 관심을 어떻게 붙잡아둘까?

셋째,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을 어떻게 분명히 밝힐까?

넷째, 독자에게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들을 웃고 울리고 생각하게 할까?

내장산은 우리나라의 명산이다. 정읍 사람들은 그 내장산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산다. 또 정읍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내장산을 즐겨 찾는다. 정읍의 문인이라면 내장산을 소재로 글 한두 편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도원 백남인도 다를 바 없다.

내장산은 안내(內)자와 감출장(藏)자로 이름 그대로라면 산 안에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건데, 어떤 이는 온갖 보물이 비장되어 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관광차로 몇 백 명이 일시에 와도 5분만 지나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산이 사람을 감춘다고나 할까?(중략)

내장산에는 임진왜란 때 안의와 송홍록에 의해 조선왕조실록을 숨겼던 용굴과 희묵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왜군에게 타격을 준 유군차 등 곳곳에 호국의 역사적 현장이 있는가 하면, 사랑의 다리와 기름바위, 문필암에 얽힌 아기자기한 전설이 있으며, 우화정의 맑은 물과 전망대의 시원한 바람을 노래한 사람도 많다.

「나의 내장산 사랑」중에서

해마다 11월 초쯤이면 붉게 물든 내장산 단풍들이 방방곡곡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아 내장산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내장산이 수필가 도원 백남인에게 앞으로 내장산을 소재로 한 수필을 몇 편이나 더 쓰게 할지 모른다.

수필가에게 수필은 끝없는 수도와 정진의 길이다. 자기의 글이 늘 무언가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구도자의 자세로 겸허히 수필을 빚는다면 언젠가는 자기가 기대하는 수필가로서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도원 백남인의 수필에서는 선비냄새가 난다. 40여 년간 교직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교육자였기에 그럴 것이고, 또 『명심보감』에 심취하여 선비의 자세로 살아왔기에 그럴 지도 모른다.

제5부 「명절이 뭐길래」에는 선비냄새가 나는 수필들이 유난히 많다.「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라는 수필이 눈길을 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본을 무의식중에 받게 되어 특별히 효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효행이 몸에 배게 되어 효자효녀가 될 것이며,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잘 받드는 것을 보고 자란 내 자녀는 효행심이 자연스럽게 내면화 될 것이다. 그렇다면 효란 무엇인가? 부모님께 근심을 끼치지 않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중에서

그래서 예로부터 효자 집안에서 효자 난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요즘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녀들의 시범조교나 다를 바 없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자라면서 배우는 게 자녀들이다. 그러니 효자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자소학』에서도 이렇게 가르치지 않던가? ‘신체의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으로 감히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진리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까지 날려서 부모를 빛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라고 했다. 현대인들이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 교훈이려니 싶다.

정읍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전주를 갈 때면 우스운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삼천동을 지나 완산동을 향해 운전하고 있는 버스기사는 “효자 내리세요!” 하고 안내방송을 한다. 종점까지 가고 있는 남은 승객은 모두 불효저란 말인가?

「못 다한 효」 서두

순간포착을 잘 한 수필의 서두가 아닐 수 없다. 수필의 서두는 독자의 구미를 돋우고 호기심을 자극하여 궁금증을 자아내게 쓰는 게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서두는 성공적인 서두라 할 수 있다.

젊은 나이에 부모를 여읜 도원 백남인은 효도할 기회를 잃은 것을 한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반포지효(反哺之孝)란 사자성어가 있다. 까마귀도 어릴 때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로 자란 뒤에는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도학자풍의 도원 백남인도 유머러스한 수필을 쓴다. 무궁무진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도원 선생, 요즘 유행하는 말 ‘청바지’의 뜻 알아?”

“아무렴, 알고 있지. ‘청춘은 바로 지금’이란 말 아닌가?”

“맞아.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바로 지금, 현재만이 내 생의 남은 날 중에서 가장 젊은 날, 청춘이지.”

“그럼 당신은 청바지를 어떻게 보내고 있어?”

“날마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고 할까? 심신이 모두 한창 때이던 청춘시절엔 큰 행복을 향해 매진했었지만, 마음만 청춘인 지금은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이 순간도 행복한 거야?”

“그렇지. 항상 행복하지. 못 가진 것에 미련 두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니 늘 행복해. 지족상족(知足常足)이지.”

「난 괜찮게 살고 있어」서두

이것은 드물게 보는 희곡적 수필 수법이다. 수필가 도원 백남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일생동안 양보한 거리를 모두 합해도 10리를 넘지 않고, 일생동안 양보한 시간을 모두 합해도 하루를 넘지 않는다.’ 그럴 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도원 백남인 수필가는 부지런한 작가요, 탐구심이 강한 수필가다. 항상 발과 가슴으로 수필을 쓴다. 직접 현장을 발로 찾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또 그의 눈에 띄는 것에도 항상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작가의 그러한 마음과 행동은 그대로 독자에게 전이된다. 그러니 작가와 독자는 이신동체(二身同體)가 된다.

제6부 「추억과 우정의 여행」에서는 여행기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나는 정읍인」이란 수필에 관심이 갔다. 도원 백남인이 정읍 사람이란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나는 정읍인’이라고 내세울 게 무어란 말인가? 정읍에서 태어나 자랐고 평생 살았으며 노년도 정읍에서 보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정읍에 사는 사람이라면 응당 정읍의 역사와 지리, 정치와 경제, 사회와 교육, 문화와 예술, 자연환경과 명승고적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올해부터 내년까지는 ‘정읍방문의 해’다. 우리 정읍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로 삼아야 할 일이다. 나는 정읍을 대표하는 시민임을 자부하며, 내가 바로 정읍 홍보대사임을 인식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문화시민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정읍인」결미

결미가 온 시민이 정읍의 홍보대사가 되자는 캠페인 성 마무리여서 신선미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작가의 애향심만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수필가는 우리말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그런 자세로 좋은 수필을 쓰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믿는다.

4. 도원 백남인 수필가가 가야할 길

桃園 백남인은 자타가 인정하는 늦깎이 수필가다. 옛날 수필가들이라면 절필할 나이에 수필공부를 시작했고,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첫 수필집을 출간했다. 그 열정이 놀랍다. 지금은 인생 100세 시대라고 한다. 늦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빠르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다. 아직도 수필이 무엇인지 모르고, 수필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수필을 읽지도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비하면 도원 백남인은 빠른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로 빚고, 체험에서 얻은 말로 다듬어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잘 만든 조화(造花)라 해도 살아 있는 한 포기의 들꽃보다는 아름답지 않듯, 잘 꾸며진 말보다는 심장에서 우러나온 말이어야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 도원 백남인의 첫 수필집 상재를 축하하며 문운창성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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