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미학

2020.11.28 20:02

김덕남 조회 수:2

[금요수필]공존의 미학 / 김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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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계절 중 가을을 제일 좋아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선한 날씨가 우선 좋아서다. 가을은 깨끗한 하늘빛과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산천이 아름답고 곡식과 과일은 무르익어 풍요롭다. 게다가 내 생일이 그중에 있어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니, 가을을 사랑한다.

끈적거리는 습한 더위와 땡볕의 열기로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긴 여름날은 혹독하기만 하다. 동화 같은 백설의 감성은 소녀적 이야기일 뿐, 빙판길 낙상이 생사의 일이 될 수도 있는 나이고 보니, 겨울 추위나 쌓이는 눈이 반갑지 않다. 봄날은 또 어떤가. 심술궂은 꽃샘추위에 제 몫도 못 하고 영 등 할미 바람의 존재만 내세우다 불곰 성미로 달려드는 더위에 밀려 황망히 달아나는 봄날 또한 허망할 뿐이다.

쥐띠 해 깊어가는 가을 저녁, 날 낳으신 어머니는 “너는 평생 배곯는 일은 없을 것이다” 했다. 요즘 세상에 밥 먹고 사는 정도가 부富를 누리는 팔자라고 여길 덕담이기나 하겠는가. 하지만, 추수가 끝난 어둑한 들판은 서생원의 거리낌 없는 활동 무대였음은 틀림없었을 터이다. 어찌했건 부모님 덕으로 배워, 공직에서 꽃을 피웠고 은퇴 후에도 밥은 굶지 않는 형편이니, 어머니의 내 팔자 풀이는 일리가 있던 셈이었다.

친구와 점심을 하고 돌아오는 길,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도열하고 있는 가로수 은행나무의 황금빛 향연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은행잎이 바람에 꽃비처럼 후두두 떨어지더니 노란 나비가 되어 날아든다. 쌓인 낙엽들이 소독차 꽁무니를 따르며 즐거워하던 아이들처럼 바람을 일으키는 자동차 뒤를 따라 떼구루루 몰려간다. 검은 나무 둥치는 묵직한 존재로 서서 은행잎 사이사이로 가지를 뻗고 노란 잎과 대비되어 그 빛깔이 선연하다.

햇살을 안고 끝없이 펼쳐진 억새들의 은빛 물결이 장관이다. 저마다의 갈 빛을 내려받은 언덕의 풀잎들은 자줏빛, 연 노란빛, 분홍빛의 들국화와 경계 없이 어우러지며 내 발길을 붙든다. 단풍잎이 온 숲을 붉게 물들였다. 붉은 단풍 아래로 시차를 두고 서서히 물들고 있는 적 녹색 이파리들, 단풍나무 붉은빛은 그들의 푸른 기운 앞에서 더욱 강렬하다.

누름 한 옷으로 덧입는 황 녹의 느티나무, 주홍, 주황, 노랑, 갈 빛 등, 짙고 옅은 색조로 숙성되어 팔랑거리는 벚나무. 그들 사이로 햇살 한 줌 쏟아진다. 단풍잎들은 그 빛으로 더욱 투명하고 맑아 지극히 환상적이다. 검은 나무 둥치는 가로수길 은행나무에서처럼 단풍 숲 사이사이에서도 마력의 색채 조력자로 존재감을 보였다. 흑갈색 나무 둥치가 물기라도 머금은 날이면 고혹적인 그 깊은 운치는 더 말해 무엇 하리.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농익은 단풍 숲은 팔레트의 물감을 옮겨놓은 듯 화려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푸름의 세월을 다 하고도 절대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깊어가는 가을 숲. 오만과 허욕으로 초라한 내 모습이 억지 없는 자연 앞에서 찬미로 깨어난다.어느 무엇이 이 가을의 모습보다 더 깊고 융숭하리.

높고 푸른 하늘로 철새들의 비행이 매끄럽다. 묵언의 규율에 따라 선두가 바뀌어도 그들의 정교한 대열은 폭넓은 날갯짓으로만 멀어져 간다. 남편이 가을 바라기인 나에게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라며, 가을 잔치라는 뜻의 추연秋宴으로 호를 선물했다. 그러니 이 가을처럼 나의 내면도 아름답게 잘 익어가는 인생이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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