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남자 친구로

2021.05.26 17:26

노기제 조회 수: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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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4                                    내게 남자친구를 안겨 준 코로나 19

                                                                                      

설촌 노기제

 

   인생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매사를 걸고넘어지는 사람이라 꼴 보기 싫어 잠간 인연을 끊겠다고 결심하고 살았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하며 산다고 바보 취급에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려 드는가. 나도 밖에서는 웬만큼 똑똑하단 소리도 듣고, 그리 떨어지는 수준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성격이 밝은 까닭에 하늘에 의지하고 감사함으로 편히 지냈다.

   문제는 코로나 19 때문에 생겼다. 아무리 자신만만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선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나는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생각이 같아졌다. 행여 어떤 불이익이라도 받게 된다면 서로를 챙겨줘야 한다는 무의식 속 의식이 꿈틀 솟아오른 것이다.

   그동안 쌓였던 불평불만일랑 잠시 잊어버리고, 심각해지는 비상시국에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견디고 살아남을 것인가를 얘기한다. 남편의 일터가 병원인 만큼 내 식구 하나 챙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이런저런 환자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남편에겐 돌봐줘야 하는 사람의 숫자가 엄청나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부서는 아니어도, 많이 노출된 곳임엔 틀림없다. 무엇을 겁내서 피하기보다는 날마다의 생활에 기쁨을 주고, 적절한 대화로 위로하며 면역력을 높이는 시간들로 부부가 함께 만들어야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들에게도 그리하며 살아야 하거늘, 밥도 짓고 죽도 쑤며 산 세월이 48년차니 무얼 망설이겠나. 마음 한구석이 짠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사람을 돌보랴 싶어 얼었던 마음을 풀었다. 이런저런 하찮은 이유로 일터에서 항상 불이익을 당하는 남편이다. 젊고 약아빠진 외국인 약사들보다 배 이상의 처방전을 완성해도 누구하나 고마워하는 사람 없다. 더 빨리, 더 많이 하라는 눈치를 주는 윗사람에, 이용하며 시기하는 얄미운 동료들뿐이다.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도 성격상 일이 밀려 있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어쩌다 발생하는 실수가 면죄되는 것도 아니다. 조심하고 천천히 확인하고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쇠기의 경 읽기가 따로 있나. 자업자득이니 알아서 하라고 포기한지 오래다.

   근면성실이 걸림돌이 되어 본인에게 화가 되어 돌아오는 생활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니 동정도 잠깐, 나도 치쳐서 손 놓아 버렸다. 그냥저냥 살아지는 세상에선 내가 손 놓아도 잘 흘러가지만 코로나 19처럼 강력한 방해꾼이라면 내가 곁에 있어야 산다. 난 하나님 빽이 든든하니 혼자서도 얼마든지 견딘다. 그런 걸 인정하지 못하는 남편은 자기만이 나를 보호해줘야 하고, 자기만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야 한다고 법석이다.

   못 말리는 커플이다. 피식 웃다가도 이번엔 고마운 생각이 든다. 남편 아니면 어느 누가 내 걱정을 이리하랴 싶어서다. 귀찮고 짜증만 나던 남편의 잔소리가 따스하게 들린다. 닷새 내내 일하고 주말이면 피곤키도 하련만, 내가 어디 가고 싶어 하는지, 뭘 먹고 싶어 하는지, 온통 나를 향해 초집중이다.

   연애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뒤 돌아볼것 없이 지금이 바로 그때가 되도록 만들어 보고 싶다. 날마다 궁금해서 전화하던 그때.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미국 선교사에게 배우던 영어 성경 시간에 그를 끌어들이던 그때. 단점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그때. 나를 세상에서 제일 스마트한 여자라고 착각해서 결혼하려 한 남자였던 그때. (결혼 일 주년이 되기도 전에 마누라가 보통보다 훨씬 머리가 좋지 않은 걸 알아버린 남자) 무엇보다 우린 철저하게 서로를 존중했고, 말도 조심해서 고은말만 사용했고, 양가 식구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도 기울였었다.

   지금 새로운 사람 만나서 서로 맞춰가며 어느 세월에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될 수 있겠는가.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산 세월을 챙기자. 귀한 시간들을 추슬러 행복한 뭉텅이로 꿰매어 보자. 겪어보니 이렇게 하면 어찌 될 것이고, 저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란 답안지가 손에 있지 않은가. 맘에 안 드는 남편 버려버리고 맘에 들었던 남자친구 소환해서 살아야 하겠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앞으로의 내 인생은 펼쳐질 것이다.

 

 

20201002 중앙일보 문예마당에 남편을 남자친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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