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사람

2021.08.20 15:02

노기제 조회 수:18

 

HIT_6790.jpg

20210411                                                   생각나는 사람

                                                                                        

설촌

 

   “XX항공 XXX편으로 XX로 가시는 승객 여러분들은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비행기로 여행을 할 때마다 공항에서 듣는 이 멘트엔 아름다운 추억이 숨어 있다. 사건을 펼쳐보면 아시시 아찔하지만, 내겐 두려움을 이긴 용감하고 예쁜 사람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서순석? 50년이란 세월이 덮어버린 기억이니, 그의 이름이 가물가물 자신이 없다.

   지피지기란 생각으로 일본어를 배우던 시절, 일본이란 아무래도 적국이라는 관념이 팽배했던 내 세대였다. 어느 날 강사의 지각으로 학생들이 웅성대던 시간에 학생 신분인 내가 복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배운 만큼은 내 것이니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 후, 일본항공에서 학원으로 계약직 요청이 들어 왔다. 강사의 추천으로 온전하지 않은 일본어 실력으로 면접을 보고 공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영어도 시원치 않고 일어도 흉내만 내던 내가 내노라하는 직원들과 일할 때 날마다 살얼음판이었다.

   일본인 상사들과 한국인 동료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속에 함께 섞여 흐를 수 없는 이질감. 그 불편한 직장에서 내가 은근히 의지했던 사람이 서순석씨다. 나보다 몇 살이나 아래였는지 기억에 없다. 일어는 약했지만 영어가 유창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승객들 상대로 일과를 보낸다. 사무실 업무가 아니다. 승객을 태우고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위해 체크인을 시작으로 탑승을 위한 방송 업무도 있다. 비행기 정비 상태에 따라 가끔은 이륙시간이 일정보다 늦어지는 경우가 있다. 경험이 없으니 모든 이착륙 시간은 항상 칼 같이 지켜지려니 인식하던 초보자다.

   승객들 체크인이 끝나고 탑승 수속을 위한 방송을 하러 방송실로 들어갔다. Japan Air Line은 방송을 하지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방송실 안내 아가씨가 알려 준다. 잠깐이려니 앉아 기다렸다. 51030분이 지나고 있는데 뭔가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둥빈둥 앉아서 놀고 있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근무 태도가 형편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좌불안석이 되어 가슴이 빨리 뛴다. 어쩌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근무시간에 방송실에 숨어서 뭐하고 있는건가.

   이건 아니지 싶어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그냥 방송을했다. 어서 탑승 준비들 하시라고. 애초 방송하지 말라는 지시도 직접 받은 것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의기양양해서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최고 대빵 고야상이 묻는다. 누가 방송하라 지시했느냐고. 허걱. 얼떨김에 미스 서라 했다.

   비행기에 승객 전원 탑승을 도와주고, 그라운드에서 돌아온 미스 서를 고야상이 째려본다. 잔뜩 쫄아든 내 심장은 호흡마저 곤란하다. 퇴근하며 미스 서에게 이실직고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서 고야상이 그렇게 나를 째려봤구나쿨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직장 초보자와 베테랑의 차이가 뼈아프게 내 자존감에 상처를 남긴, 일생일대 커다란 사건이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정신줄 놓을만큼 아찔하다. 비행기는 정비가 끝나지 않아 승객을 탑승시킬 수 없는 상태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수많은 승객들은 와르르 탑승하랬다고 줄지어 서고 있다. 그런 상태로 도꾜까지 무사히 비행했으리라.

   나의 이민 생활 한참 후에, 서순석씨가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당당한 모습, 약한자를 돕고자 남의 실수도 불평 없이 대신 뒤집어 써준, 서순석씨가 가끔 생각이 난다. 다시 어떤 바람을 타고라도 그의 소식이 날아오길 기다려본다.

 

 

 

댓글 0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339 봄 나들이 노기제 2023.10.02 16
338 신당 5동 작은 도서관 노기제 2023.10.02 14
337 화재 경보 노기제 2023.10.02 7
336 영웅시대의 찐 사랑 노기제 2023.10.02 10
335 신이 몰빵한 사내 노기제 2023.10.02 11
334 봄을 만나려는 마음 노기제 2023.10.02 8
333 신년 산행 노기제 2023.10.02 7
332 퇴고분 님 그림자, 곰 그림자 노기제 2023.05.28 20
331 벗고 살리라 [2] 노기제 2022.05.06 74
330 칭찬하는 문화 노기제 2022.05.06 38
329 바람난 남편 설촌 2022.03.09 55
328 발레리나의 선물 설촌 2022.03.09 38
327 집 나간 목소리 설촌 2022.03.09 39
326 경주댁이 보여준 사랑 노기제 2021.11.11 63
325 임영웅 위로와 힐링을 주는 사람 노기제 2021.11.11 82
324 하나보다는 둘, 둘 보다는 셋 [2] 노기제 2021.08.20 47
» 생각나는 사람 노기제 2021.08.20 18
322 COVID 19 백신에 관한 나의 생각 [2] 노기제 2021.08.19 41
321 짝사랑 작사 첫사랑 작곡 [2] 노기제 2021.08.19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