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 네이버 블로그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는 누구였나

 

    19세기 미국의 산엽 혁명을 이끌었던 주도자들은 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러와 그 외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도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토마스 에디슨을 발명왕으로 참 존경해왔고 우러러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전기를 읽고 토마스 에디슨에 대한 존경심이 싹 사라지게 되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니콜라 테슬라를 모함했는지 모르지만 참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구 온나화로 자동차 배기 가스가 온난화의 주범으로 떠오르자 전기 자동차를 앞으로 생산해서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나는 테슬라의 전기 자동차를 사서 탈 것이다. 그 차를 타면서 테슬라를 생각하고 그를 기리고 싶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7월 10일 스밀잔, 지금은 크로아티아 나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장을 운영했고 3명의 오누이와 남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정교회 목사여서 아들 니콜라가 자기와 똑 같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니콜라는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리해서 수학 종교학 독일어를 공부하고 방과 후는 늘 실험을 많이 하였다. 주로 시냇가에 나무를 베어다 놓고 바퀴를 만들어 물 힘으로 돌아가게 해서 전력을 끌어내는 실험들이었다.

 

   그가 사는 곳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니콜라도 병에 걸리고 말았다. 9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니콜라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기계공학을 허락해 주면 병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너 소원대로 하라”고 니콜라에게 말했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병이 회복되었다.

 

   1875년 니콜라가 19세였을 때 오스트리아 그레이즈에 여행을 갔다. 집에서 200 마일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공예 강습소(대학 수준)를 다녔다. 지금은 그레이즈 공과대학으로 발전되었다. 지친 기색도 없이 항상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 2학년 때 파리에서 기계가 도착하여 교수님이 실험을 하는데 전류가 한쪽으로 만 흘렀다.(direct current(DC)) 즉 직류라 불리는 전류 흐름인데 전류가 멀리 흘러갈 수록 전력이 약해지지만 전류가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전력이 훨씬 강해진다고 교수님께 말했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교수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이 전류는 교류 전류(Alternating Current(AC))로 변압기에 연결하면 직류보다 전압(Voltage)이 훨씬 강하여 쓸모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이다. 교수는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지만 니콜라 테슬라는 교수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1882년 2월 니콜라는 교류 전류를 통하여 유도 전동기(induction motor)를 발명할 수가 있었다. 그는 교류 전류를 통하여 너트 볼트, dynamos, 전동기, 변압기 등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해 4월에 파리에 있는 Compagnie Continentale Edison 에 일하러 갔다. 파리에 있는 Continental Edison Company의 불란스 사무실이었다. 이 회사는 바로 저 유명한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앨바 에디슨의 사무실이었다. 그 당시 니콜라의 일은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전등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전등 설치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모두가 직류전류(DC) 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토머스 엘바 에디슨(1847-1931)이 발명왕이 되어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발명품들은 모두가 중요한 것이었다. 전구를 만들었고 축음기, 녹음기, 영화 찍는 사진기, 타이프라이터를 발명하여 인류의 생활패턴을 바꾸어 놓았다.

 

   니콜라는 회사 우두머리 한 사람이 뉴욕에 있는 에디슨 회사에 파송이 되어 일하고 있는데 니콜라도 같이 가서 일하자고 했다. 니콜라는 배를 타고 뉴욕에 가기로 했는데 짐을 싸는 동안 도둑을 맞아 돈을 다 빼앗기고 짐 보따리도 잃고 말았다. 1884년 6월 6일에 4 센트만 갖고 그는 뉴욕에 도착하였다. 헝가리 발명왕인 ‘트리바다 푸스카스(Trivadar Puskas)’ 의 소개장을 들고 에디슨에게 주려고 가지고 왔다. 빈털터리 상태로…푸스카스는 소개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위대한 두 사람을 알고 있는데 당신이  그중 한 사람이고 이 편지를 들고 가는 니콜라가  다른 한 사람이다.”

 

   토마스 에디슨은 니콜라를 채용하여 그를 “파리사람(the Parisian”이라 부르며 에디슨 기계작업을 하도록 했다. 에디슨은 열심히 일하는 니콜라에게 감동을 받았다. 장시간 일하는 모습은 자기와 닮은데가 있었다. 에디슨도 장시간 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에디슨이 밤새도록 일한 후 새벽 5시에 연구실을 떠나고 있었다. 그는 니콜라를 보고 파리사람이 늦게까지 일하고 있구나 하면서 농담을 했지만, 실상 그는 밤새도록  잠 자지않고 발전기를 고치고 있었다. 이 발전기는 에디슨 회사가 SS Oregon 이란 배에 설치한 발전기였다. 최초로 배에 전기 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배여서 에디슨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에디슨은 니콜라에게 회사의 직류 발전기 모두를 다시 재조립하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 작업은 엄청나게 큰 작업이었다. 모두 20개의 기계를 모두 재조립하는 과제였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오만 달러($50,000)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에디슨은 니콜라에게 말했다. 니콜라는 거의 일 년 동안 매일 아침 10시 30분에 일을 시작하여 그다음 날 새벽 5시 까지 일하게 되었다. 그가 일을  완성 했을 때 약속한 거금은 주지 않고 에디슨은 자기가 농담으로 약속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거금은 단지 농담일 뿐이었어.”하고 “당신은 미국의 유머를 이해 못 하는군요.”하고 에디슨은 말했다. 그는 농담으로 생각지 않고 밤낮으로  열심히 발전기를 직류전류에서 교류전류로 바꾸는 데 사력을 다해 일했을 뿐이다. 너무나 실망한 니콜라는 더 이상 이 회사와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해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1880년대 중반에 뉴욕시에는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고층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1885년에 프랑스에서 미국에 선물로 도착했다. 뉴욕 만해튼 일부 지역에서 뉴욕 에디슨 전기조명회사에 의해 전등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에게는[김1] [김2]  참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실직을 당했고, 무일푼이었다. 그는 혈혈단신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지구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문대학에 들어가 과학, 기계학을 전공하고 많은 책을 읽고 끊임없이 전류에 대한 문제들을 풀려고 노력해 온 모든 것이 시간을 낭비하게 됐나  생각하게 되었다.

 

   니콜라는 다행히 하루에 두 달러를 버는 수로를 파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작업을 맡은 반장이 니콜라가 교류전류 발전기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그는 니콜라에게 탁월한 한 전기기사를 알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Alfred Brown이라고 말했다.

 

   브라운(Mr. Brown)이 니콜라를 만났을 때 니콜라의 교류전류(Alternating Current)에 대한 얘기를 듣고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은 챨스 팩(Charles Peck)이란 변호사를 고용해서 테슬라 전기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1886년 가을에 뉴욕에다 실험실을 개장하게 되었다. 교류전류 공학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려고 열심히 일했다.

 

같은 해에  미국정부는 니콜라에게 첫 특허를 수여 했다. 1888년 콜롬비아 대학의 전기공학부에 니콜라는 교류전류 발전기와 변압기의 기계장치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아무도 하지 못한 전기에 대한 미래의 확실한 비전을 그는 갖고 있었다.

 

   니콜라가 받은 특허는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의 소유주 조지 웨시팅하우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지는 에디슨 전기회사와 직접적인 경쟁자였다. 니콜라는 조지에게 전기사업에 있어서 에디슨을 능가할 수 있다고 조지에게 설명했다. 에디슨은 1882년에 뉴욕 맨해튼의 일부 지역에 전기를 공급했다. 그러나 대부분 미국인들은 문명에서 50년이나 뒤져 있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가스 램프와 초를 사용하고 있었다. 직류 전류는 멀리 가지 못하고 전력이 약해져 사용을 못하기 때문에 많은 전력공급 공장을 지어야만 했다. 니콜라의 교류 전류 체제는 공장 하나만 있어도 수천명의 미국인들에게 전기를 공급할 수가 있었다.

 

  죠지 웨시팅하우스는 니콜라의 교류 전류 특허를 그로부터 사고 싶어 했다. 특허를 사게 되면 자기 특허처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웨스팅하우스는 니콜라에게 특허값으로 거액을 제안했다. 테슬라는 30여 개의 특허에 대해 $60,000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 돈으로는 백 오십만 달러 ($1.5 million)에 해당되는 돈이다. 웨스팅하우스가 새 특허를 사용할 때마다 로열티(Royalties)를 그에게 주기로 했다.

 

   그가 32세 생일이 되기 며칠 전에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그는 멀리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돈을 보냈고 자기를 도왔던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마음껏 실험실에서 새로운 개발을 위해 일을 했다.

 

   그는 펜실베니아 핏츠버그에 살면서 웨스팅하우스가 그의 특허를 이용해 성공하도록 여러모로 도왔다. 그러나 1889년 그는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는 뉴욕 그랜드 거리에 새 실험실을 개설하고 호화로운 에스토 하우스 호텔로 이사를 했다. 그는 저명인사와 과학자들을 실험실로 초대해서 교류 전류가 얼마나 직류 전류보다 월등히 우세하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 주면서 쇼맨쉽을 나타내기도 했다.

 

   니콜라는 뉴욕 실험실에서 테슬라 코일 (Tesla Coil)을 비롯해 많은 실험을 하게 되었다. 테슬라 코일은 낮은 전압 교류 전류를 취해 높은 전압 교류 전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한 전류를 방류해서 번개처럼 보이는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니콜라의 놀라운 상상력은 그가 천재가 되는 열쇠가 되었다. 이것이 일반 전기 기사와 그를 다르게 만들었던다.

 

   니콜라는 많은 시간을 혼자 일했다. 그러나 그는 외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많은 중요한 과학자들을 그의 실험실로 초대했고 저녁 만찬 파티에도 초대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 루디야드 키플링 등 저명 인사를 초대했다.

 

   니콜라는 저녁 만찬 파티에 정장을 하였다. 성공을 하기 위해선 사람은 성공한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키가 6 피트가 되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여성이 흠모했지만, 그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아내에게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기 연구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다.

 

   1890년에 웨스팅하우스 주식회사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재정 적자를 내었다. 니콜라는 친구 웨스팅하우스를 돕기 위해 계약서에 기록되어 있는 로얄티 받는다는 구절이 쓰여있는 계약서를 찢어 버렸다. 그것은 니콜라가  웨스팅하우스로 부터 더 이상 돈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돈을 더 버는 것 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많은 전기를 공급할 것인가 생각하며 발명품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니콜라가 웨스팅하우스와 파트너쉽을 갖인 것이  토마스 에디슨에게는 큰 문제였다. 그 당시 미국에는 소수의 가정만 전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 시에서는 가로등을 갖게 되었지만, 그나마 시 골에 사는 시민들은 가로등마저 보지 못했다. 전깃줄은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발전기(dynamo)로부터 장거리로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집마다 전기를 설치할 수 있는 어떤 전기회사이든 방법을 발견한다면 거액을 벌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니콜라와 웨스팅하우스는 교류전류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믿고 있었다. 큰 전류 공급 공장을 설치 한다면 높은 전압을 가지고 장거리까지 공급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 가정집에 더욱 안전하게 낮은 전압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직류 전류는 낮은 전압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안전한 전압으로는 단거리만 공급할 수가 있었다. 직류 전류로는 1 마일마다 작은 전력공급 공장이 필요했다.

 

    토마스 에디슨은 벌써 전력 공급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1882년 그의 첫 번째 직류 전압 공장을 뉴욕에 개설했었다. 그는 직류 전기가 기초가 된다면 그가 세운 많은 직류 전압 공장에서 많은 재정적 손실을 볼 것을 알고 있었다. 테슬라가 발명한 교류 전류를 사용하는 것은 나쁘고 위험한 일이라며 대중들을 설득시키려 했다. 그는 거짓말을 열심히 유포하기 시작했다. 테슬라의 교류 전류는 치명적이라는 수천 개의 팸플릿을 만들어 유포했다. 그는 가공할 만한 수단으로 전기 기사와 한 팀이 되어 교류 전류를 사용하여 유기견을 전기의자에 앉혀 감전사시키면서 교류 전류는 치명적이라고 투자가들과 관공서 직원들에게 겁을 주었다. 니콜라는 직류 전류 든 교류 전류든 전기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콜라는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교류 전류가 직류 전류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었을까?

 

   1891년에 니콜라가 미국 시민권자가 되던 해였다.

 

그가 파리에 있는 동안 삼촌 피타르에게 전보가 왔는데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도 쉬지 못하고 아주 먼 여행을 했다고 그는 말했다. 몇 주 후 그의 어머니는 사망하였다.  니콜라가 미국에 돌아온 후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되는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에 전력 공급 계약을 따게 되었다

 

이 박람회는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미 대륙에 상륙한지 400년이 된 것을 축하하기위한 박람회였다.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보다도 싼 가격에 전력공급을 하겠다고 제의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력 공급을 박람회 전체에 하게 되어 교류 전류가 안전하고 효율적이란 것을 보여 줄 절호의 기회였다.

 

   200,000 만개가 넘는 전구가 컬럼비안 박람회에 교류 전류 전압으로 진열장에 설치되었다. 니콜라는 관람객들에게 뉴욕 그의 실험실에서 한 것처럼 직접 시범을 보여 주며 그들을 열광시켰다.

 

 박람회 6개월째 끝나 갈 무렵 그는 관람객들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 박람회 방문객들은 직접 그들 눈으로 교류 전류가 얼마나 안전하고 유용한 가를 볼 수 있었다. 그후 미국에서 교류 전류가 소비자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기본 체계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교류 전류와 직류 전류와의 전쟁에서 단지 싸움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실제로 전기를 대중들의 집에 공급하는 것은 더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는 해답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찾았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나이아가라에 대해 한 책을 읽은 후 수력 전력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물이 낙하하는 힘이나 흘러넘치는 힘으로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급속도로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소위 터빈(turbine) 이라 불리는 바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빙빙 돌아가는 터빈은 전기를 발전시키는 전동기의 금속 굴대를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다른 과학자들과 기계 공학자들은 오랫동안 나이아가라 폭포의 힘을 사용하여 전력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컬럼비안 박람회에서 교류 전류의 성공은 뉴욕에 있는 주 공무원들을 확신시킬 수 있었다. 박람회가 끝나기 전 뉴욕 주는 니콜라의 특허권과 교류 전류의 공학을 이용하여 나이아가라 폭포에 울대와 발전기를 설치하는 계약을 웨스팅하우스 주식회사와 체결하게 되었다.

 

  1895년에 첫 번째 발전기를 실험하였다. 그다음 해 세계 최초로 가장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를 공개적으로 개설하게 되었다. 곧바로 20 마일 떨어진 뉴욕 버펄로에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수년 내로 400 마일이 넘는 뉴욕시에 전기를 공급하는 범위가 되었다.

 

   그제야 미국 동부해안선 지역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의 시민들에게 니콜라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까지 미국 시민의 절반이 전력이 공급되는 현대 시대에 살게끔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니콜라는 다음 사업 목표인 무선 통신산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전화기는 1876년에 알랙산더 그라함 벨이 발명하였다. 그러나 물론 전깃 줄도 필요로 했다.

 

  니콜라가가 태어나기 전 까지도 전선으로 시그날을 보내어 장거리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이 기계는 모스 코드(Morse Code)를 사용하여 통화 할 수가 있었다. 전깃줄이 없는 곳에서는 라디오 주파수를 이용하여 통화 할 수가 있었다. 1895년에 라디오 공학 부문에서 특허를 받게 되었다. 그는 송전기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뉴욕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 불이 일어나  모든 것을 소실하게 되었다.

 

  니콜라는 라디오 주파수에 대해 강의를 하게 되었다. 전화줄 없이 서로 통화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날 셀 폰과 같은 것이었다.

 

   높은 전압을 가진 실험을 그의 실험실에서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1899년에 콜로라도에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큰 실험실을 지울 수가 있었다. 직경이 52 피트나 되는 거대한 테슬라 코일을 그곳에 설치하였다. 전선 줄 없이 수많은 마일을 넘어 전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거대한 전력 사용지대를 만들었다.

 

   워덴클리프란 장소에다 탑을 설치했다.  그는 희망하기를 이 탑이 전선 줄 없이 전력과 시그날을 보내는 세계에서 첫번째 탑이 되기를 희망했다.

 

   워덴클리프에 대한 니콜라의 계획은 성사가 되지 않았다. 1905년에 그는 실험실 문을 닫아야 했다.

 

   니콜라는 그 당시 단지 49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워덴클리프를 문 닫은 후에 그는 과학자들로부터 사라지는 것 같이 보였다.  1917년 5월에 미국 전기 공학대학으로 부터 가장 높은 명예의 에디슨 메달을 받았다. 1919년에  니콜라는 ‘전기 실험 잡지사’에 처음으로 연재물을 쓰기 시작했다. 편집자는 그 뒤에 ‘나의 발명품’이라고 불리는 테슬라 자서전에다 이 연재물들을 합쳤다.

 

  니콜라는 그에게 흥미를 주었던 많은 프로젝트에 대해 계속 일을 했다. 1920년에 수직으로 이륙할 수 있는 헬리콥터와 같은 비행체를 설계했는데 비행기와 같이 날 수 있기를 바랐다. 니콜라는 항상 시대를 앞지른 천재였다. 몇 년 후 미국 군부에서 그와 비슷한 비행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는 뉴욕 거리를 장시간 걷거나 브라이언트 공원에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일로 소일했다. 그는 이 호텔 저 호텔로 전전하였는데 밀린 사용료 때문이 아니면 비둘기를 호텔방으로 데려와 청소부들이 불평하는 바람에 이사를 자주 했다.

 

  마침내  웨스팅하우스 주식회사는 니콜라가 로열티(특허권 사용료)를 안 받겠다고 계약서를 찢어 버렸을 때 호탤 뉴욕크의 방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정을 했었다.

 

  매년 그의 생일이 돌아때 마다 신문기자들을 호텔로 초대하여 그의 새로운 계획과 생각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날이 갈수록 이상해 졌다. 모든 전쟁을 종식 시킬 ‘죽음의 방사선’에 대해 얘기했다. 그가 발전 전개할 주요 새로운 전력 소스에 대해 또한 암시하기도 했다.

 

   웨스팅하우스 회사와 그의 로열티(특허 사용료) 계약서를 찢어 버렸던 결심은 그에게 수백만 달러의 손해를 가져다주어, 니콜라는 결국 무일푼이 되었다. 그가 결혼하지 않기로 한 것 때문에 그의 옆에 아무 가족도 없었다.

 

  이 사실이 매우 슬프게 들릴지 몰라도 니콜라의 평판은 그가 죽은 후에 더욱더 높았고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천재적 두뇌에 영예를 부여했고 그의 많은 과학적인 발명품과 발전을 이 룬데 대해 그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1843년에 미국 대법원은 니콜라가  라디오 발명에 큰 공헌을 했다고 판결을 내렸다. 1975년에 미국의 명예의 전당에 테슬라의 이름이 올려지게 되었다. 1983년에 미국 우정국 우표에 그의 얼굴이 올려졌다. 그의 얼굴은  5 디나 화폐와 유고슬라비아 5백만 디나 화폐에 나타났고 세르비아 100디나 화폐에도 나타났다.

 

  테슬라 코일은 로스엔젤레스 그리피스 천문 기상대에 진열돼 있고 시카고에 있는 과학과 산업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테슬라 주식회사는 그를 기리기 위해 테슬라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호화 전기차 회사이다. 셀 폰과 인터넷 , GPS, 라디오, 텔레비전, 레이다, 네온사인 등은 현대 많은 공학분야의 발달과 함께 니콜라 테슬라의 놀라운 일생 사업과 아이디어로 마들어 진 것이다.

 

   반은 창조적인 천재이고 반은 미친 과학자였던 그는 자기 당대의 시대를 완전히 앞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 시대가 도래하도록 만들었었다. 1943년 그는 뉴욕에서 87세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 회사가 재정이 어려운 것을 보고 그 회사와 체결했던 로열티를 안 받겠다고 계약서를 찢어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토마스 에디슨은 니콜라 테슬라를 고용하여 자기 발전기  20개를 일 년 여 걸쳐 모두 교류전류로 바꾸도록 했다.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밤낮으로 일을 끝마쳤을 때 보너스로 5 만불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농담으로 말했다고 거절하면서 노동을 완전히 착취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교류 전류가 직류 전류 보다 나쁘다며 대중들에게 감언이설로 속였고 팔플릿까지 만들어 교류 전류는 위험하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유기견을 전기의자에 앉히고 전기기사와 함께 교류 전류로 감전사시키면서 교류 전류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강조하면서 니콜라 테슬라의 성공을 방해했다.

 

   니콜라 테슬라는 동정심이 많아 웨스팅하우스 회사에서 받을 로열티 계약을 취소할 만큼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로열티를 취소 안 했어도 넉넉하게 그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 뗀데….살아서는 고생했지만 사후 그의 공로가 인정을 받기 시작해서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독자들은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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