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남편

2022.03.09 20:51

설촌 조회 수:55

IMG_1881.jpg

20210729                                             바람난 남편

                                                                                               노기제(수필가)

 

   1995년 봄쯤이었나? 내가 23년 살고있던 엘에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주요 일간신문에 보도 되었던 기사를 떠올려 본다. 남의 얘기를 활자로 읽으면서 별 특별한 느낌 없이 키득대던 기억이다. 철이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아픔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마음에 어찌 그리 공감할 수 없었던지. 강 건너 불구경이다. 그 후 스물여섯 번이나 새로운 봄이 지나간 지금, 그 기사의 주인공들을 기억해본다. 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강제로 받은 고통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이제야 아프게 공감되는 이유는 성장이겠다.

   65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 세대엔 K, E, S, 여고 트로이카가 유명하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남학생들이 최고의 관심을 보이는 대상이다. 세 여고의 확실한 특성들을 꼴 지어 놓고, 미래의 신부감을 상상하던 남학생들이 대세였던 시절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허다한 아내들이 하는 말이다. 단순하지만 정확한 아내의 촉이란 것을 내세운다. 하늘이 주신 특혜라 짐작된다. 멍청하게 걸려드는 남편들이 근육을 동원하면서 부정을 해도, 결국 수긍으로 마무리 짓고 물증을 차압 당한다.

   혹시나 했던 아내는 눈이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이라고? 그 지경에 들어서면 사랑 타령은 주제가 아니다. 부부간의 믿음? 따질 여유도 없다. 그냥 죽이고 싶다. 내가 아닌 딴 여자가 선택을 받아서 자존심에 먹물 벼락 맞았다는 분노? 확실하게 규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일상생활이 무너진다.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어떤 복수를 계획할 수 있겠는가. 모른다. 행동이 앞설 뿐이다. 부엌으로 뛰쳐들어가 불에 냄비를 올리고 기름을 끓인다. 펄펄 끓는 기름을 보면서도 딱히 확실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을거다. 본인의 머릿속이 끓고 있다. 본인의 심장이 난리 나서 쾅쾅 날뛰는데 무슨 계획을 세우고 차분히 생각이란 걸 했겠는가.

   잠든 남편이 시야에 들어오니 의식 반, 무의식 반으로 온전하지 못한 판단력이 시키는 대로 끓는 기름을 들고 남편을 향했을 뿐이다. 그 중요한 부분에 쏟아부었더니 남편의 비명과 함께 아내는 자신에게서 도망쳤던 우아함의 상징인 판단력이 급하게 돌아왔다고 짐작된다. K 여고다.

   바람난 남편은 티를 낸다. 자신의 입으로 상간녀를 소개한다. 칭찬이 자자하다. 아내에게 일면식도 없는 여자 얘기를 끝도 없이 흘린다. 직장 동료 또는 친구가 바람을 피운다고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가며 본인의 얘기를 자꾸 한다. 숨길 수 없이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말 없어도 전에 없이 헤벌죽 기분이 좋아 보인다.

   장단 맞춰주며 캐어 묻다 보면 꼬리는 확실히 잡게 된다. 뭐에다 쓸 수 있겠나 그 꼬리를.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졸지에 피폐해지는 자신의 입지가 견딜 수 없으니 목을 맨다. S 여고다.

   형형색색의 많은 시간들이 지났지만 스스로 목을 맸던 사람은 타인의 반응 따윈 느낄 수 없다. 극단의 분노를 표출한 사람은, 그때 받은 미친 상처가 치유되어 말갛게 잊고 남편을 용서하는 마무리를 어떻게 했을지. 이제라도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다. 떠난 사람도 힘들게 살아 있는 사람도 내 곁에 있는 듯, 그들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하늘로 올리련다. 더는 말랑말랑 건강한 심장이 아니어도, 운 나쁘게 맞아버린 녹슨 칼자국일랑 완전히 사라졌기를 소망한다.

 

 

 

그 기사를 떠올리며 한 무리의 동기들이 허공에 쏘아 올리는 한마디 우린 맞바람 피면 되지마음에 상처를 준 당사자에게 우리도 마음을 공격하자.  E 여고다

2021년 8월 13일 금요일 중앙일보 문예마당

 

댓글 0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339 봄 나들이 노기제 2023.10.02 16
338 신당 5동 작은 도서관 노기제 2023.10.02 15
337 화재 경보 노기제 2023.10.02 7
336 영웅시대의 찐 사랑 노기제 2023.10.02 10
335 신이 몰빵한 사내 노기제 2023.10.02 11
334 봄을 만나려는 마음 노기제 2023.10.02 8
333 신년 산행 노기제 2023.10.02 7
332 퇴고분 님 그림자, 곰 그림자 노기제 2023.05.28 20
331 벗고 살리라 [2] 노기제 2022.05.06 74
330 칭찬하는 문화 노기제 2022.05.06 39
» 바람난 남편 설촌 2022.03.09 55
328 발레리나의 선물 설촌 2022.03.09 38
327 집 나간 목소리 설촌 2022.03.09 39
326 경주댁이 보여준 사랑 노기제 2021.11.11 64
325 임영웅 위로와 힐링을 주는 사람 노기제 2021.11.11 82
324 하나보다는 둘, 둘 보다는 셋 [2] 노기제 2021.08.20 47
323 생각나는 사람 노기제 2021.08.20 18
322 COVID 19 백신에 관한 나의 생각 [2] 노기제 2021.08.19 41
321 짝사랑 작사 첫사랑 작곡 [2] 노기제 2021.08.19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