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여명 속을 달리다

2018.10.20 07:34

서경 조회 수:10


여명 속을 달리다.jpg



   마라톤 대회 당일인 10월 7일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캄캄한 밤을 뚫고 달려가 세리토스 공원에서 일행을 만났다. 밤과 새벽이 쫓고 쫓기며  부지런히 여명을 향해 달린다. 
  복잡한 교통난을 생각해 일찌감치 나섰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별 막힘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마도 다음 주에 연달아 있는 빅 베어 마라톤으로 많이 빠져 나간 듯하다. 
  공식 시합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우리팀에서도 다음 주 빅 베어 마라톤에 풀 뛰는 사람들이 대거 등록하는 바람에 올해 롱비치 마라톤은 하프 마라톤 주자들의 잔치가 됐다. 
  하프 출발 시간이 7시 반이라 하니 거의 한 시간 반이나 남았다. 봉사자들이 정성껏 준비해 온 미숫가루와 고구마 그리고 커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스트레칭까지 끝냈다. 
  두근두근. 가슴이 뛴다. 꼭 일년 육개월만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첫 마라톤 출발선에 설 때와 똑 같다. 다른 점이라면, 불안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앞선다고나 할까.
  목표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마일당 13분대로 잡았다. 그래야만, 12분대와 14분대를 오르내리며 여유있게 뛸 수 있다. 종은 누구를 위해 울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울린다. 달리기도 마찬 가지다. 
  희부염한 회색 구름 아래로 아침 해가 붉은 기운을 펼치며 서서히 여명의 하늘을 물들인다. 한 무리의 갈매기떼가 나래치며 날아간 하늘 길로 뒤쳐진 녀석이 급하게 따라 붙는다. 그 때다. 
  “온다! 온다!!” 누군가 소리쳤다! 벌써 풀 출발한 사람들이 우리 첫 응원팀이 기다리고 있는 6마일 지점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다. 선두 주자 서 너 명이 치고 나가자, 너 댓명의 무리가 제 2진, 3진을 형성하며 연이어 달려 왔다. 
  그런데, 팔 자세들이 우리가 배운 정석과는 달리 제 각각이다. 흔드는 모양들이 너무 웃겨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가 뛸 때는 더하겠지’ 하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어이하여 팔 자세가 엉성한데도 선두 그룹에 들 정도로 속도가 빠른지 그게 의문이었다. 
  어둠 속에 빨려 선두 주자들이 지나가고 계속 풀 주자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자 선두들도 지나갔다. 역시 늘씬 늘씬한 젊은 애들이 잘 뛰고 보기에도 좋다. 
  햇살이 밝아오고 서서히 열리는 여명의 바다. 롱비치 바닷가의 새벽 하늘과 일제히 뭍으로 내려와 유유자적 노니는 갈매기떼를 보는 사이, 하프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앞에서부터 착착 목표하는 시간대별로 끊어 출발했다. 나는 조복자 코치와 마일당 12분을 예상하는 신선희 팀과 함께 출발선에 섰다. 돈 주고 뛰는 고행의 길이건만 모두 싱글벙글이다. 롱비치 마라톤은 더위 때문에 해마다 고생을 했는데 오늘은 선선해서 다행이다. 
  드디어 출발이다. 포도 위로 수 천 수 만의 건각들이 지축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첫발을 내딛으면 반드시 끝나게 되는 게 달리기 묘미다. 스타트 라인이 있으면 어딘가엔 피니시 라인이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 끝나지 않는 길이라면 누군들 달릴 수 있으랴. 
  함께 뛰는 마라톤. 그러나 출발선을 떠나면 홀로 뛰는 경주다.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 지듯 마라톤도 철저히 자기와의 싸움이다. 스피드의 완급조절은 물론이요 호흡 방법이나 보폭 거리 조정도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몫이다. 열심히 연습한 사람은 그만큼 수월하겠지만, 게을리한 사람은 고통을 통해 자기 게으름을 통절히 후회하게 된다. 
  누가 그랬던가. ‘오늘은 내가 살아 온 어제의 결과물’이라고. 번번이 후회하면서도 연습 없이 출발선에 서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욕심까지 얹어 뛰게 되면 메달보다 먼저 얻는 게 부상이다. 다행히도, 내 주제를 알아 목표치를 낮추어 뛰다 보니 부상은 아직 한번도 없다.
  규칙적으로 12분대로 뛰는 조복자 코치와 발을 맞추어 뛰다 보니 어느 새 6마일 지점에 이르렀다. 난 여지껏 부담스러워서 페이스 메이커하고 함께 뛰어온 적이 없는데 함께 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조 코치는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굉장히 편하게 해 주는 분이다.  
  하지만, 내 식대로 사진도 찍고 자유롭게 뛰고 싶어 화장실까지 가며 슬쩍 템포를 늦추었다. 오랫동안 쉬었다가 다시 뛰는 첫경기라, 스피드보다는 워밍업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뛰고 싶었다. 도중에 화장실을 가면 10분 손해는 기본이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에서 나오니 벌써 함께 뛰던 조 코치와 동료는 아득히 먼 거리로 달아났다. 족히 1마일은 멀어진 듯하다. 그럼에도, 노란 레온 티셔츠에 빨간 모자를 쓴 우리 팀 유니폼은 한 눈에 보였다. 
  한참을 달리니, 그 명성도 자자한(?) 우리 치어 리더 팀이 뛰어나와 화들짝 반겨 준다. 얼음 물과 찬 수건을 쥐어주며 힘찬 응원을 해 준다. 없던 힘도 절로 나고 얼음 한 조각 입에 무니 내 세상이 따로 없다. 흐르는 땀 찬 물수건으로 닦으며 여유롭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시간이다. 멀리 정박해 있는 퀸 메리호도 눈에 들어 오고, 윤슬로 반짝이는 잔물결도 눈에 담긴다. 새까맣게 깔린 갈매기떼가 모래펄에서 산보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수평으로 흐르던 시선을 수직으로 높이니 구름은 어느 새 푸른 하늘에 몸을 풀어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흐른다. 
  10마일 쯤 가니, 빨간 모자를 쓴 멋쟁이 신사가 달려 와 급히 사진을 찍어댄다. 균형 잡힌 몸매에 달리기 폼이 환상인 송두석 코치다. V자를 크게 그려준 뒤, 응원팀 석으로 달려가 수박을 먹으며 잠깐 숨고르기를 했다. 얼음까지 채워준 코카콜라는 완전히 생명의 감로주다.  
   “이제 3마일 남았으니 이대로 쭉 달리세요!” 송 코치가 힘찬 응원을 보내 준다. 수박도 먹었겠다, 감로주도 마셨겠다, Why Not?  마음 같아서는 뭘 못하랴. 하지만, 몸이 문제다. 그래도 응원에 힘 입어 없는 힘도 짜내 본다.
  다들 먼저 갔는지 뒤에 오는지 우리 팀 빨간 모자는 보이지 않고 0.8 마일 팻말이 보인다. 까짓 것, 1마일도 안 되는 것, 전 속력으로 달려 봐? 내면의 소리는 호기롭기만 하다. 
  마음은 박남정인데 몸은 김정구라는 고전적 우스개 소리는 딱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렸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웅성거리는 걸로 봐서는 피니시 라인이 가까운 것 같은데 이놈의 0.8 마일이 도대체 줄지 않는다. 하지만, 말 없는 발은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할 뿐이다. 
  드디어 오르막길. 이 길을 지나면 내리막 길이 나오고 그 끝엔 대망의 피니시 라인이 날 기다리고 있다. 뿐인가. 우리 응원팀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빨간 모자 노란 티셔츠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보는 거다. 
  드디어 내리막길. 느슨하게 달려온 터라 힘도 남았겠다, 냅다 100미터 선수처럼 전 속력으로 내달았다. 마파람이 상쾌하게 뺨을 스쳐 지나 갔다. 마치 내가 바람 속으로 달려가는 기분이다. 
  드디어 골 인! 예상 시간보다 한 십 분은 늦은 것같다. 자원 봉사자가 달려 와 환히 웃으며 묵직한 황금 메달을 걸어 준다. 물 한 병을 받고 돌아 보니 바나나, 초콜렛, 드링크 등 각종 간식이 테이블에 즐비하다. 맥주 마시기도 마다하고 우리 팀 텐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 갔다. 
  모두들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 준다. 먼저 온 사람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게 우리 인생 아니겠나 싶다. 
  대회 끝난 뒤, 다함께 The East Buffet에 가서 먹은 점심은 완전 환상적이었다. 품평회겸 나온 이야기는 연습 강도를 높여 좀더 질적 향상을 하자는 것. 달리기 팀으로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이왕 뛰는 거. 나도 좀더 조일 필요가 있다. 
  스물스물 기어 오르며 나를 치감는 이 기분은 무엇인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풀 마라톤에 대한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디민다. 한 번 해 봐? 말어? 오늘 따라, Why Not 이란 내면의 반문이 자꾸만 나를 부추긴다. 응원 차, 빅 베어 갔다 오면 한번쯤 고민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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