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비 오는 날의 정경

2019.05.30 03:05

서경 조회 수:49


 비 오는 날의 정경.jpg


  묵언응시...... 비 오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말이 필요 없다. 지긋이 바라 보며 빗님의 심안을 읽을 뿐.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바람에 흩날렸다 다시 모인다. 빗방울에 또 한 빗방울이 얹히니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차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빈 자리는 다시 다른 빗방울로 채워진다. 차창에 매달리는 빗방울들이 계속 새 풍경화를 걸어 준다. 
  풍경화가 바뀔 때마다, 생각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흩어졌다 모여든다. 생각이 생각을 불러 와, 빗방울 만큼이나 많은 추억들이 내 심연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비오는 날의 사색은 깊고 빨라서, 수직 하강하다가도 곧 솟구치고 다시 수평으로 영토를 넓혀 간다.

   나는 비 오는 날의 이런 자유분망한 사색이 좋다. 공상, 망상, 상상, 환상...... 총망라다. 이름을 붙여서 무엇하리. 빗님 따라 내 마음 따라가면 그 뿐이다. 
  빗님은 참으로 다재 다능한 감성 화가다. 밑그림 선연한 수채화나 수묵화를 그리기도 하고 부드러운 파스텔화를 그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가물가물한 기억마저 지우며 무수한 선들로 갈색 추상화를 그리기도 한다. 평화랄까, 안온함이랄까, 슬픔이랄까.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내 마음은 감성에 함뿍 젖는 화선지가 된다.
  저 멀리, 세리토스 공원으로 들어서는 입구 신호등이 보인다. 번질거리는 포도 위로 색상 고운 불빛이 어린다. 잿빛 풍경에 화사한 코사지 같은 액센트다. 
  매주 일요일 새벽 여섯이면 모이는 우리 해피 러너스 달리미들. 비 오는 날은 모임을 생략할 수도 있으련만, ‘무조건’ 만나고 보잔다. 비가 오면 지붕이 있는 곳에서 만나면 된다고. 크레이지 러브. 나는 ‘무조건’ 만나자란 말과 상큼한 발상이 좋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렇다. 사랑하면 조건이 필요 없다. 이유도 핑계도 필요없다. 피곤도 잠도 멀리 달아난다. 굳이 조건을 내세운다면 ‘무조건’이다. 나는 ‘무조건’을 위해 이 비 오는 새벽길을 ‘무작정’ 달려 나왔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무모할 정도로 머뭇거림이 없다. 핑계나 이유 대신, 방법을 찾는다. 젊은 날의 나는 너무 머뭇거렸고 생각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사랑을 떠나 보내고 그런 심각함으로 귀한 시간을 놓쳤다. 아름다운 추억을 더 많이 쌓지 못해 한이 된다. 젊은 날에 대한 후회가 있다면 오직 이 하나 뿐이다.
  이젠, 멈칫거리거나 머뭇대거나 주저하거나 생각이 많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아니, 무의미하다. 감정 소모에 시간 낭비다. 
  머뭇대다 얻는 베네핏은 무엇인가. 안정? 편안함? 체면유지? 사랑은 인생과 같아서 늘 모험을 담보로 한다. 모험을 원치 않는 자, 길을 나서지 않아야 한다. 
  이제 나는 무모하고 싶다. 생각보다 행동하고 싶다. 머리보다 발을 섬기고 싶다. 모든 장식 떼어내고 심플하게 살고 싶다. 사십 년 동안,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밖에 안한 내가 어느 날 이불을 박차고 새벽길에 나선 것도 이런 동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새로 마름질하고 싶었다. 육체적 건강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을 위하여 길을 나섰다. ‘방, 콕’에서, ‘침대 껌딱지’에서 나를 구제하고 싶었다. 
  생각은 뛰면서 하기로 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던 지난 날에 대한 자성이 나를 변화시켰다. 비로소 나는 나를 발견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방향타를 잡는다. 
  남의 평가나 이목에 더 소심했던 나. 이제서야, 나는 남의 시선이나 이목에서 자유롭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내 속도대로 달리고, 늦추고 빠르기도 내가 정한다. 무리하다 부상 당하면 나만 손해다. 내 호흡은 내가 하는 거지,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나에겐 아직도 잠들지 않고 녹슬지 않는 열정이 남아 있다. 난 거기에 희망을 두고 새롭게 인생 삼모작에 나선다. 아름다움은 발견되고, 열정은 깨어나는 것. 잃어버린 시간을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시간은 더욱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나온 덕분에, 모처럼 비오는 새벽길을 만끽하며 달린다. 
  갈라진 논밭에 단비가 필요하듯, 메마른 가슴에도 수분이 필요하다. 눈물이든, 감성이든 촉촉한 가슴 지니며 살고 싶다. 세찬 빗줄기는 때로 가슴에 홈을 파지만, 이 정도 빗물이야 뼛속까지 젖을라구. 언제나 얘기하듯, 사랑하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만나고 보는 거다. 만나는 순간, 또 하나의 추억이 탄생하는 거다. 
  사랑의 공식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시간이 빠지면 추억이 되고, 공간이 빠지면 그리움이 된다. 긴 기다림 끝에 체득한 나만의 진리다. 추억이나 그리움은 사랑의 산물이지, 사랑의 진행형은 아니다. 추억도 사랑하지만, 이왕이면 사랑도 행복도 현재 진행형으로 가꾸고 싶다. 
  이제 우리 나이쯤 되면, 사랑의 대상이 어디 이성 뿐이랴. 만나서 눈맞춤 하는 모든 만상이 다 사랑의 대상이요 정인인 것을. 사랑의 공식도 모든 대상에게 적용된다. 하다 못해, 무생물이나 사물에게도 적용되는 관계다. 
  사랑한다는 건 더불어 산다는 것. 바로,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것이다. 거기에 영혼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 합일이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서’ 사랑을 주고 받을 일이다. 이왕이면, 열정적이고 능동적으로 할 일이다.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이나 스치는 풍경은 추억이 된다. 추억은 찰진 삶을 위한 저금. 어줍잖은 말 하나 표정 하나,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모두 추억거리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나고 느끼는 매 순간을 기록으로 남긴다. 
  대단한 작품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생활 기록으로 남긴다. 나는 오래 전에 문학 수필의 욕심을 버렸기에 몸에 힘을 뺀 지 오래다. 자연스럽고 편하게, 이제는 이런 마음으로 쓴다. 결국, 글쓰기도 내겐 능동적인 사랑의 행위다. 
  먼훗날, 흔들 의자에 앉아 하나하나 펼쳐 볼 추억의 보고 나의 글들. 인쇄되지 않은 나만의 수필집이라고나  할까. 내 떠나고 난 뒤엔, 또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페이지를 넘기겠지. 나를 위해 쓰고, 정인을 위해 쓰고, 무엇보다도 나하고 눈맞춤한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쓴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 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증인이 된다. 꽃만 아니라, 잎에도 줄기에도 눈길을 주는 것은 모두 이런 연유다.
  누군가는 시인이나 작가라서 쓸 수 있다고 한다. 그건 아니다. 사랑하면? 보, 인, 다. 스쳐가면 잊혀지나 응시하면 보인다. 뿐인가. 속말도 건네 온다. 그 말을 받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전언은 맞춤법 필요 없는 자연 언어다. 형용사보다는 동사의 어법이다. 몸으로 보여주는 모습에서 삶의 심호흡을 배운다. 
  거리는 빗물로 번득이고 흩날리는 빗방울 속에 흐려진 풍경. 그 수채화 풍경 속으로 한 점 점이 되어 빨려든다. 마치, 수많은 빗방울 속에 한 방울의 빗방울처럼 스며드는 나. 풍경과 사람의 어울림은 얼마나 절묘한 구상인가.
  아무리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라도 그 속에 사람이 없다면...... 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세월호 아이들이 떠난 뒤, 소리란 소리는 다 사라지고 적막감만 돌던 아이들의 방. 뼛속까지 시리고 가슴 아려오던 아픔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난, 사람이 좋고 왁자하게 떠들며 터뜨리는 너털웃음이 좋다. 
  바위 뚫고 솟은 소나무처럼 독야청청하기 보다, 더불어 사는 숲 속의 한 그루 잡목이고 싶다. 다른 좋은 말 다 두고, <더불어 사는 삶>이란 내 이민 좌우명을 편액에 담아온 것도 오늘에사 그 의미를 더한다. 홀로 하는 면벽수행은 나에게 수행이 아니라, 벌이다. 
  나지막하던 빗줄기가 갑자기 드세졌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왁자한 개구리 울음소리 내며 일제히 합창을 한다. 바빠진 바람도 빗방울 날리기에 신이 났다. 나도 신난다. 
  빗님은 인간의 감성을 탄주하는 연주자인가. 변주곡의 귀재다. 잔잔했던 감성이 드세진 빗줄기 따라 열정적으로 출렁댄다. 이 정도 기분이라면, 소낙비 속에서라도 질주할 수 있을 것같다. 
  언제나 비가 그리운 남가주. 오월의 비가 선물처럼 내린 일요일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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