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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녀 제이드가 올 5월에 대학 졸업을 했다. 학교는 투산에 있는 애리조나 유니버시티. 전공은 Global Political Economy & Institution.

    전공과목은 이름도 생소하고 길어 글로벌 스터디 정도로 알고 있었다. 뭘 배우고 앞으로의 진로는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제 엄마랑 어련히 알아서 정했겠나 싶어 물어보지도 않았었다.

    애리조나 투산 방문은 생전 처음이다. 손녀 졸업식만 아니면, 올 일이 없는 도시다. 여기저기 떼 지어 떠도는 구름과 하늘을 찌를 듯한 선인장이 퍽 인상적이었다. 학교 건물은 종합대학답게 크고 웅장했다. 한편, 인디언 냄새가 살짝 풍겨나는 고풍스런 모습이었다.

   올해, 155번째 졸업식을 맞는 애리조나 유니버시티는 총 6700 명의 학사와 석사를 배출했다. 풋볼 경기장에서 열린 졸업 축하 행사는 감동적인 연설과 불꽃놀이로 화려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 휴머니스트!

    아이는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특별히 가슴에 사랑을 담뿍 안고 자란 아이다운 대답이었다. 돈하고는 거리가 조금 먼 전공이라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 휴머니스트란 대답에는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 휴머니스트?

- ! 저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 , 그래? 넌 어릴 때부터 사랑이 많은 아이였지! 잘 할 수 있을 거야! 이제 졸업하면 뭐 할 건데?

- 남미 콜롬비아로 3개월간 연수 떠나요.

- 그래? 스페니쉬 잘 하니 커뮤니케이션은 걱정 없고... 위험하진 않아?

- 보고타는 캐피탈 시티라서 위험하진 않는가 봐요.

- 요즘은 세상이 하도 험해서 길만 나서면 걱정이야.

- 조심해야지요.

- 그래. 갔다 오면 공부 아니면 취직?

- 취직해서 일단 현장에서 일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계속 공부해서 마스터 디그리 딸 거에요.

- 생각 잘 했네? 이왕이면, 박사까지 따서 높은 포지션을 가지고 일하면 더 좋겠지. 인권 변호사가 되어도 좋고. 우리나라 대통령도 두 사람이나 인권 변호사로 일하다가 대통령 됐어. 그냥 자기가 유명해지고 싶어 대통령 된 거 아니고, 더 파워 있게 일하려고.

- ! 저도 공부는 계속할 생각이에요.

- 그래, 일은 어디서 하려고?

- 주로 정부 잡이나 유엔 아니면 앰네스티 같은 인권단체에서 일할 수 있어요.

- , 그래? 여기저기 위험한 나라에도 가야 되겠네?

-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필요하다면 가야지요.

    은근히 걱정하는 할미와는 달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 순교자가 되어도 좋다는 결기마저 보였다. 아이 앞길이 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더 이상 뭐라 보탤 말이 없어 창 밖에 눈을 던졌다.

    사람은 저마다 결과 색을 지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꿈이 깨어져 흰 포말로 사라지더라도, 일단 파도는 바위에 부딪치고 본다. 그러면서 물러나고 다시 와 부딪치며 인생을 배워 나간다.

    높이 치솟았다 주저앉고 다시 치솟는 파도의 고저에서 그들은 또 삶을 배워 나가리라. 아무리 높은 정점에 이른다 해도 거기에 영원히 머물 수 없으며, 아무리 나락에 떨어졌다 해도 거기 또한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음도 배울 터. 삶은 몸으로 부딪치며 동사로 받아내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긴 여정이었다. 글렌데일 제네럴 하스피털에서 딸의 해산을 기다리며 가슴 조이던 그날. 모니터의 아기 심장 박동 소리가 내 가슴을 두드리던 감격적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쿵쾅쿵쾅. 뚜구국 뚜구둑. 어린 생명의 박동 소리가 그토록 크고 강렬한지 몰랐다. 귀가 아니라, 가슴을 밟고 오는 그 소리는 감격을 넘어 눈물겨웠다. 마치, 말갈기 휘날리며 달려오는 초인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무엇을 위하여 이 험한 세상을 향해 저리도 숨차게 달려오고 있는가. 무슨 승전보가 있기에 저리도 지축을 울리며 맹렬히 달려오는 것일까. 한 생명이 탄생하는 소리는 그토록 엄중하고 귀했다. 소리란 소리 중에 가장 감동적인 소리를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이 세상을 향해 달려오는 생명의 말발굽 소리라 말하겠다.

    그 감격의 심장 뛰는 소리에 이어 우렁찬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들은 지 어느 새 21년이 지났다. 세월은 유수와 같고 화살과 같다는 상투적 표현이 정말 무색할 정도로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그 세월의 더께 속에 녹아 있는 기쁨과 감동과 눈물을 어찌 한 편의 수필에 담을 수 있으랴.

    게다가, 제이드는 열 여덟 살 어린 엄마가 낳은 Teen Mom 딸이 아닌가. 자칫 했으면 이 세상 빛을 못 볼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인생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만약 그때 제 엄마가 인간적 체면과 자신의 안일만을 위했더라면 결코 태어날 수 없었던 아이다. 그리고 그때 만약 나의 자존심과 딸의 앞날을 위해 “keep 하고 싶어!”하고 울먹이던 딸아이 마음을 거부하고 낙태를 시켰다면 오늘의 성공담은 없었으리라.

    성공담. 한 생명을 위하여 딸과 나, 그리고 잘 자라 준 제이드까지 우리 세 명이 함께 헤쳐 나온 21년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 성공담이란 훈장을 달아줘도 좋으리. 아기 제이드의 심장 박동 소리가 유달리 내 심장을 울린 것도 유다른 탄생 비화 때문인지 모른다. 오늘 따라, 딸이 더욱 대견해 보이는 것 역시 우리 함께 걸어 나온 추억의 통로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삶이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쉬임없이 이어지는 것. 끝나지 않는 연재소설이다. 생로병사. , 넉 자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게 삶의 이야기다. 한 자 한 자 사이에 놓인 그 계곡의 깊이와 높은 산 또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를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삶은 만주평원처럼 밋밋하지 않고 산수 수려한 아름다운 풍경화가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앞으로도, 제이드에겐 온 길보다 훨씬 험하고 먼 여정이 남아 있다. 지속적인 공부와 경험을 통하여 계속 자신의 내공을 쌓아가야 하리라. 아는 만큼 보이고 갖춘 만큼 그 재능을 발할 수 있을 터이다. 사실, 공부란 자신을 위한 것보다 남에게 주기 위해서 할 때 그 진가가 더욱 빛난다.

    학문과 예술에 심취했던 슈바이처 박사도 서른 늦깎이에 의사 공부를 하고 아프리카로 떠나지 않았는가. 그는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해 주기 위하여 사랑의 마음 하나로 다시 공부를 하고 아프리카 오지로 길을 떠났다. 어차피, 돈보다 사람을 돕고 싶어 선택한 길. 제이드도 그런 큰마음으로 학문을 닦고 제 길을 걸어갔으면 싶다.

    인형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고, 동물을 사랑하던 아이. 동화책을 읽던 중, ‘HATE’는 너무 나쁜 말이라며 소리 내어 읽지도 못하고 귓가에 조그맣게 한 자 한 자 스펠링으로 들려주던 다섯 살 아이. 라면 하나를 끓여도 엄마 건 꼬들꼬들하게, 나에게는 푹 퍼지게, 제 것은 알맞게 끓이느라 부엌을 부지런히 오가던 꼬마 아가씨.

    그 아이가 자라서 이제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숨을 좀 고르나 싶었는데, 졸업한 지 2주 남짓 지나 남미 콜롬비아로 연수차 떠난단다. 치안이 안정되지 않는 나라에 보내는 것이 못내 불안하지만 제 선택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지켜 주시길 간절히 빌 뿐이다.

    우리 누구나 그렇듯이, 제이드도 이 땅에 태어난 뜻이 있을 터이다. 주님의 미션이 무엇인지 모르나, 자칫 했으면 이 세상 빛을 못 볼 뻔한 제이드였기에 더욱 강렬한 미션이 있지 않나 싶다. 지금 손녀는 콜롬비아에 대한 공부와 짐 꾸리기에 여념이 없다임마누엘 하느님께 어디에 가든지 함께 해 주시고 우리 제이드를 선한 도구로 써 주시길 빌며 성호를 그었다.   (2019년 <가톨릭문학 제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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