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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다는 게 싫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절대로 도장 못 찍어 줘!”
  일선 담당자는 아들같은 청년 가수에게 비수를 던졌다. 오직, 그가 미시민권자요 공연이 낯설다는 이유로. 23세 가수양준일은 체류 연장을 거부 당하고 피 철철 흘리며 그렇게 ‘조국’을 떠나 왔다.
  미시민권자는 피가 부르는 대한민국을 ‘조국’이라 부르면 안 되는가. 그 곳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면 안 되는가. 개성은 낯섬이요, 예술은 다양성이 아닌가.
  외면을 넘어 배척하고 퇴출했던 그 대한민국이 웬일로 그를 다시 소환했다. 실로, 강산도 세 번 바뀐 30년만의 일이었다. 묻어 두었던 가슴 상채기에 소금을 뿌린 듯 쓰라렸다. 이미 잊고 산 무대, 30년만의 추억 소환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스스로 연예인이 아니라고 주문처럼 외우며 살았다.
자신을 밑바닥까지 내려놓고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무수한 쓰레기를 버리며 현장 수행을 했다. 그의 30년은 그를 괴롭히는 머릿속 ‘쓰레기’를 버리기 위한 혹독한 수련 기간이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불행했던 과거를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은 이미 육화되었다.
  그는 다시 자신을 ‘쓰레기 하차장’으로 내던질 수 없었다.
그의 소박한 꿈은 남편과 아빠로서 겸손되이 사는 거였다. 그것만으로 그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조차 매일 매일이 기적이라고 감사하며 살았다.
  이제 그는 더 버릴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었다.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는 것까지 배운 후였다. 고등학생 때 포쉐를 탈 정도의 부잣집 도련님도, 명문대 USC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엘리트도, 한때 무대에서 끼를 발산했던 가수도 그에겐 장식이요 추억일 뿐이었다.
  그는 연예인 시절에 입었던 모든 옷을 버렸다. 단지, 단 한 벌의 죠지 알마니 양복만을 간직했다. 그것은 고급 양복이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도 삶도 패션이라 여기는 그에게 클래식한 삶을 대변해 주는 메타포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다시 무대에 선다? 그토록 오랜 세월, 자기와의 피나는 싸움을 해 온 그가?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평생 안 봐도 좋다며 단 한 번만 무대에 서 달라는 팬의 간절한 부탁에 그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과 진심은 통하는 법. 그 역시 단 한번만이라 생각했다.
  슈가맨 3. 그는 몇 분간의 퍼포먼스로 무대를 ‘박살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자신이 박살나거나 무대가 박살나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각오로 무대에 서 왔던 사람. 그는 일시에 30년 세월의 공백을 지워 버렸다.
  그는 허영이나 허명을 위해 무대에 섰던 연예인이 아니었다. 춤이 좋아 춤을 췄고 노래가 좋아 노래를 불렀다. 심오한 철학적 가사의 노래보다 그냥 귀엽고 예쁜 사랑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스물 초반 대학생 가수였다.
  무대를 잊은, 아니 무대를 잃은 그에게 슈가맨 3 스테이지는 그야말로 그의 놀이터였다. 20대 대학생 가수에서 50대 웨이터 아저씨로 바뀌었지만, 그의 발이 버티고 선 무대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재적 끼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준비 자세로 선 그의 실루엣 모습 하나로 단번에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손끝 하나, 몸짓 하나 하나가 깃털같이 가볍고 자유로웠다. 그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춤추는 것같았다. 그는 <리베카>를 불렀고, 리베카는 그와 솔메이트가 되어 함께 무대를 누볐다.
  30년의 세월을 빛의 속도로 거슬러 올라간 그때 그 모습의 양준일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녹슬지 않는 춤사위에 방부제를 바른 듯한 외모와 몸매.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구도 그를 50대 아저씨로 보지 않았다. 30년간 단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실로 믿기지 않는 완벽한 무대였다.
  뿐이랴. 그는 수십 년간 면벽수행한 스님도 갖지 못한 맑은 표정과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무한반복하며 이어가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그의 순진무구한 미소는 불만 불평에 찌든 사람들의 얼굴에도 복사꽃 웃음을 번지게 했다. 행복 바이러스. 이만큼 치명적이고 지독한 바이러스가 있을까.
  달맞이꽃처럼 밤이슬 맞으며 눈물 속에 핀 꽃, 비애미의 극치였다. 뼈 마디 마디 아픔을 딛고 자란 대나무처럼 그는 놀라울 정도로 성숙했다. 홀로 견디어 온 30년 세월. 그 세월이 빚어낸 백자 같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마치 ‘어린 왕자’ 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눈빛은 맑고 영롱했으며 미소는 티없이 밝고 환했다. 남녀노소. 그 모두에게 ‘잃어버린 동화’를 다시 들려준 양준일. ‘시간의 여행자’ ‘비상하지 못한 용’은 그렇게 돌아 왔다.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서.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인천 공항에 도착하셨습니다!”란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아내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는 그. 투명인간처럼 취급받았던 아픔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존재로 바뀌는 순간, 엉엉 울었다는 그. 팬들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와 숨을 못 쉬겠다며 울먹이는 모습이 아름답고도 짠하다.
  이제 그는 웃고 있다. 받아 들여짐에 감격해 하고 행복해 한다. 아직도 그에 대한 환호와 반응이 놀라와 꿈만 같다며 적응 중이라 했다.
 그 앞에 어찌 꽃길만 열리겠는가. 세상 인심이란 조석간에 변하는 것. 악플도 달리고 악평도 따르겠지. 그도 이 사실을 안다. 그래서 이 한순간의 행복에 취하지 않으려고 오늘도 머릿속 ‘쓰레기’를 버리려 노력한다. 단 한번의 받아짐일지라도 영원히 잊지못할 거라고, 그 힘으로 살아 갈 거라고 다짐한다.
  ‘존재가 아트’라며 그를 지지해 주는 수많은 팬들과 가족이 있기에 그는 이전보다 더욱 잘 견디어 내리라. 아니, 롤러코스트 같은 질곡된 삶의 내공이 그를 든든히 지켜내 주리라 믿는다. 인생은 결국 홀로서기요,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에.
  30년간 ‘투명인간’ 취급 받았던 그의 무존재가 이제 빛을 발하는 귀한 존재로 각광 받고 있다. 그는 아팠던 만큼 충분히 보상 받아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나도 그의 팬이 되었다. 특히, 내 유일한 18번 ‘J에게’를 즐겨 불러 좋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엘톤 존의 ‘Tonight'을 그도 제일 좋아한다고 해서 더욱 좋다. 사소한 공통점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석이 된다는 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 그에게 내 마음의 엽서를 띄우고 싶다.  
 
  - 미소가 아름다운 그대.
     마음도 아름다운 그대.
     생각이 맑고 건전한 그대.
     내친 사람들, 원망하지 않아서 감사해요.
     부디, ‘조국’에서 맞는 제2의 삶이 좋은 선택이기를.
     더 이상 상처 받지 않는 행복한 삶이 되기를. -
     
  이 기회에, 고국 방문조차 거부 당하고 있는 가수 ‘유승준’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면 좋겠다. 못나도, 부족해도 다 대한의 아들들이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 따라 미국에 왔다. 부모따라 왔다가 드라이브 라이센스 따듯이 시민권자가 되었다. 더듬거리는 말이라도 모국어로 노래 부르고 춤추겠다고 조국을 찾는 그들이다.
  비가 오면 함께 비를 맞고, 지진이 일어났다 하면 함께 가슴 쓸어내리는 게 해외에 사는 동포요 아이들이다. 기실, 해외동포는 간척사업 없이 얻은 국토의 확장자요, 혈세 한 푼 안 쓰고 보낸 민간 사절단이다. 그들의 재능과 능력은 고스란히 대한민국의 영광이요 국가의 자산이다.
  제 2, 제 3의 양준일이 안 나왔으면 한다. 그들은 따돌림의 대상이 아니라, 안아줘야할 아들들이다. 행복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삶을 30년간이나 저당잡을 특권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양준일의 신드롬이 일시적 광기로 끝나지 말고 소인배적인 삶을 되돌아 보는 자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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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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