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수필 - 해바라기 연가

2020.03.03 09:17

서경 조회 수:36

해바라기 연가.jpg



 
  해바라기를 보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생각이 난다. 워낙 좋아했던 국어라, 난 담당 과목 중에서도 국어 선생님을 제일 좋아했다. 특히, 고등 학교 R 선생님은 얼굴에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모습도 청빈한 옛선비를 닮아 특별히 더 좋아했던 것같다.
  선생님도 날 예뻐하시는 눈치였다.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은 나를 뿌듯하게 했고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다른 선생님에 비해 은근히 어리광도 나오고 부끄러움도  더 많이 타는 듯 느껴졌다.
  고2 겨울 방학을 앞둔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내 옆을 지나가시던 선생님이 노트 제일 뒷 페이지를 열어 굵직한 붓펜으로 뭔가 휙휙 갈겨 쓰셨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른 자리로 옮겨 가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얼떨떨했다. 비밀 쪽지도 아니고 뭔가 싶어 얼른 읽어 보았다.  
 
  -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내가 모르는 싯귀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 고결했다. 특히, ‘꽃다이’ ‘넋’이란 단어가 너무 좋았다. 그 시절엔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에 꽂혀있던 때라 해바라기란 단어도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연유로 내 노트를 펼쳐 이 싯귀를 적어 주신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수업 중에 손들어 물어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업 끝난 뒤에 쫓아 가서 물어보기도 송구스러웠다.
  나는 그냥 선물삼아 주신 싯귀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았다. 물론, 비밀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영원히’ 묻지 않았다.
  고3이 되자, R선생님은 일주일에 겨우 한 번 보는 고전과 말본을 맡아 더 이상 자주 뵐 수 없었다. 도서관 관장이라, 도서관에 가면 뵐 수 있었지만 굳이 찾아 가서 뵙기도 민망했다. 오히려 선생님이 계시는 도서관에는 우정 피해 다녔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중이라 자기 시간을 더 갖기 위해 국어 대신 한가한 고전과 말본 시간을 담당하기로 했단다. 나로선 섭섭했지만, 선생님 삶은 또 따로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고3이 되자, 법 먹듯 시험을 쳤다. 시험 범위도 없었다. 아우성치며 시험 범위를 좀 가르쳐 달라면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교과서 처음부터 끝까지!”하며 오히려 약을 올린다. 아랫 동생 같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었다. 우리도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고3 쯤 되면, 각 과목 도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한 시간에 잔잔한 과목은 싸잡아 시험 치는 걸 악용해서 우리는 각각 자신있는 과목을 두 장씩 받아 치뤄 주기로 했다. 말하자면, 앞뒤 앉은 친구끼리 짜고 아예 과목 대리 시험을 쳐 주는 거다.
  내 앞에 아이가 한문 시험지를 두 장 받아 내 것까지 치고, 나는 말본(문법) 문제지를 두 장 받아 그 아이 것까지 쳐 주는 식이다. 물론, 틀리면 똑 같은 문제에 똑 같은 답으로 틀리게 되니 발본색출할 시에는 퇴학감이다. 하지만, 평균 점수를 까 먹지 않으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방법은 강구해야 한다.
  이 날 따라, R선생님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 오셨다. 대체로, 고3 시험 감독 선생님들은 너그러운 편이지만 인자한 R 선생님이 들어오자 애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변고인고? 선생님이 다른 곳도 아니고 아예 내 책상 한 쪽에 걸어 앉아 시험 감독을 하신다. 당연히 교탁 위에 서서 지켜 볼 줄 알았는데 이 무슨 낭패람. 과목 대리 시험 약속까지 하고 시험지도 벌써 두 장을 받아 두었는데.
  - 선생님! 선생님이 여기 앉아 있으니 알던 답도 생각이 안 나네예? 좀 저리 가 주이소!
  나는 급기야 선생님 밀어내기 작전에 돌입했다.
  - 이 녀석이? 시험 얼마나 잘 치나 좀 볼려고 했더니?
  - 아, 선생님 때문에 진짜 더 생각 안 난다니까요!
  계속 칭얼거리듯 말했다.
  - 알았어! 요 녀석!
  선생님은 익살스런 표정으로 꿀밤 때리는 시늉을 하시더니 자리를 떴다. 휴우- 하고 십 년 감수한 마음으로 시험을 쳤다.
  그런데 시험 친 다음날, 뜻밖에도 도서관에서 R 선생님이 날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난 완전 사색이 되었다. 아이쿠, 들켰구나. “어떡해! 어떡해!!” 친구랑 둘이 손을 맞잡고 방방 뛰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게다가, 날 예뻐하던 R 선생님 과목이라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내가 겨우 그 정도 아이밖에 안됐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아, 무어라 변명하나.’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일. 비실비실 게걸음으로 벽을 타고 가다가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선생님께 다가갔다. 그런데 예상 외로 선생님 표정이 밝다.
  - 어, 왔어?
  - 네~에...
  내 목소리는 절로 기어 들어 갔다.
  - 어, 내가 말야! 논문 준비 관계로 시험 점수 매길 시간이 없어. 우선, 희선이 꺼 봤더니 100점이야! 그걸 모범 답안지  삼아 점수 좀 매겨 줄래? 희선인 믿을 수 있을 것같아서...
  믿을 수 있을 것같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 넷! 내일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휴우- 살았다!’ 내 입에서는 절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내 인생에 다시는 대리 시험 없다!’고 결심한 것도 그 순간이다. 지옥과 천국을 몇 번이나 오갔냐 말야. 두 번 다시 못할 짓이다.
  R 선생님을 떠올리면 노트 뒤에 적어준 아름다운 싯귀와 혼돌림한 대리 시험 사건이 떠오른다. 훗날, 그 싯귀는 조지훈 시인의 <마음의 태양> 앞부분이었음을 알았다. 졸업을 하고서는 선생님께서 적어주신 육필 싯귀를 졸업 앨범 안에 곱게 끼워 오래도록 간직했다.
  내 교복 입은 모습이 참 예뻤다고 기억해 주던 선생님.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귀국차 연락한 나를 만나기 위해 손수 차를 몰고 일광까지 찾아와 주신 선생님. 그러나 이제는 가고 없는 분.
  명도 높은 노란 해바라기 사진이 오히려 블루 무드를 자아낸다. 그 분의 명복을 빌며 조용히 <마음의 태양> 전문을 외워 본다.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라 
 
     가시밭길을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은  떠오르노라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상 날아 오르는 노고지리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라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해바라기는 오늘도 태양을 따라 돌고, 나는 옛추억에 젖어 R 선생을 기린다. 
 
(사진 : 누구 작품인지 기억이 안 남. 본인 작품이면 알려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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