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 눈 덮힌 강

2020.05.02 08:36

서경 조회 수:63

눈 덮힌 강 1.jpg

 

눈 덮힌 강 2.jpg

눈 덮힌 강 3.jpg


 
흐르는 물 위로 바람 불고 눈 내려
깡깡 얼어버린 겨울 강.  
 
사공은 불 켜진 창을 향해 떠나 간 지 오~래.
눈 덮힌 겨울 강은 배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 위에 다시 눈 내리고 간간이 비 뿌려
세월의 강은 깊어만 간다. 
 
짧아져 가는 여일,
사랑했던 기억마저 희미해지려할 때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이름 하나 있어
떠나온 배는 눈 녹을 봄날을 기다린다. 
 
사랑에 정박된 여인처럼
불 켜진 창을 바라보며  
 
하마 그가 돌아 올까 봐,
다시 돌아 올까 봐. 
 

(사진 : 김동원) 
 
사랑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었다. 그날도 단 둘만의 만남을 약속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들은 각기 다른 길모퉁이에서 기다렸다. 밤은 깊어가고 검은 벨벳 밤하늘엔 별들 더욱 푸르렀다. 유성별 하나, 이승에 남기고 가는 유서인 양 한 줄 흰 시를 남기고 이름 모를 마을로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의 ‘불 꺼진 창’을 한참이나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여자도 머뭇거리다 남자의 집으로 달려 갔다. 아뿔사. 남자가 먼저 집에 온 모양이다. 그의 이층방 창문에서 불빛이 흔들렸다. 그 불빛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남자의 ‘불 켜진 창’을 지켜 끝내 밤을 새웠다.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어서... 돌릴 수 없어서... 신데렐라도 돌아가 버린 밤 열 두 시.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여자는 가슴을 조이며 몸을 숨겼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어디선가 왁자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여자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이 밤을 지키는 이가 혼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같은 평화가 흘렀다. 한 남자를 위하여, 오직 사랑이란 이름으로 온 밤을 지샐 수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밤도 사위어 가고 개구리 울음소리도 잦아졌다. 희부염한 먼동이 터 왔다. 그녀의 눈망울은 남자의 집 창문에서 대문으로 이동했다. 곧 그가 출근할 테지. 쫓아가 놀래켜야지. 여자는 혼자 미소지었다. 이윽고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출근길에 나섰다. 여자는 달려 나가려다 멈칫 발길을 거두었다. 세수하지 않은 얼굴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점점 멀어져 갔다. 뒷모습을 보인 채 멀어지는 그. 문득,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전차를 타고 가던 지바고가 우연히 길을 걷고 있는 라라를 보게 된다. 꿈에 그리던 라라. 반가움에 라라를 소리쳐 부른다. 듣지 못하는 라라. 지바고가 탄 전차는 앞으로 가는데, 라라의 발걸음은 반대 방향으로 옮겨 간다. 엇갈리는 두 사람. 점점 멀어져 가는 라라. 라라를 만나야 한다. 라라를 불러 세워야 한다. 눈물 그렁그렁한 지바고가 아무리 불러도, 라라는 끝내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전차에서 급히 내린 지바고가 뒤쫓으며  필사적으로 라라를 부른다. 역부족이다. 라라는 아득히 멀어져 군중 속에 묻힌다. 지바고의 심장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 온다. 아, 다시는 볼 수 없는 라라. Hopeless. 지바고가 가슴을 쥐어잡고 숨을 헐떡이다 길에 쓰러진다. 놀란 군중이 길바닥에 쓰러진 지바고에게 몰려 들었다. 거기에 있어야 할 오직 한 사람. 라라, 그녀는 없었다. 그 안타까운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독히도 사랑했던 두 사람의 마지막 이별 모습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어쩌면, 사랑하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별을 암시하는 은유같기도 했다. 스쳐가는 풍경처럼 무심히 앞만 보고 걸어가던 라라의 눈빛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마치,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희미한 눈빛으로 마차 위에 앉아 기타를 치며 “No Return, No Return..."하고 노래부르던 마릴린 몬로 눈빛을 연상시켰다.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건, 모두가 ‘돌아오지 않는 강’이었다. 사람도 세월도. 하지만, 참 모를 일이었다. 밤을 새운 여자의 마음은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아침이면 그를 볼 수 있다는 희망. 응원하듯 울어대는 개구리의 합창, 알퐁스 도테가 그토록 사랑했던 별들의 윙크.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겁 많던 그녀가 단 오 분이라도 그를 만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었던 마음. 그 마음이 순수하고 귀했다. 사랑이었다. 무모한 사랑이었다. 눈먼 사랑이었다. 바보같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 남자를 위하여,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슬 맞으며 밤을 지샐 수 있었다. 그것이 못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뜬금없이 사랑의 장 고린토 13장의 말씀이 떠올랐다. 비 온 뒤의 죽순처럼 그녀는 성큼 자랐다. 훗날,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불 꺼진 창’보다 ‘불켜진 창’에 유독 애착을 느끼는 이유였다. 글 사부님이 ‘불 켜진 창’보다 ‘불 꺼진 창’이 더 의미 깊고 시어로 적절하다 해도 그녀는 ‘불 켜진 창’을 버릴 수 없다 했다. 부재가 아니라, 실존으로서의 그가 불 밝은 창 안에 있었다. 언제나 애기같고 울기를 잘 하던 그녀. 돈 욕심은 없어도 사랑에 대한 로망과 책 욕심이 많았던 그녀. 삐치기도 잘 하던 그녀. 끝내 두 사람은 맺어지지도 이어지지도 못했지만, 그 날의 기억만은 가슴에 사랑의 사리로 남았다. 눈 덮힌 겨울 강에 정박된 배와 사랑에 붙들린 그녀는 어쩌면 이체동인인지도 모른다. 등불 깜빡이며 추억 속에 살아있는 그. 멀리서 손짓하는 불 켜진 창을 보며, 흰머리 소녀는 어제가 되어 버린 그 날을 조용히 회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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