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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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사계절을 만난 하루 이야기

2017.10.28 09:41

조형숙 조회 수:110

<사계절을 만난 하루 이야기>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비가 내리고 있다. 해는 비사이로 숨어버리고 어두운 길에는 굵은 줄기, 가는 줄기가 번갈아 세로줄을 긋는다. 비는 언제나 아늑한 평화를 가져다주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게 한다. 경이로움을 보고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한다. 눈이 보고 싶다는 딸과 하룻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직장에는 내일 쉰다고 통보를 하고 산장에 예약했다. 옷과 먹을 것 조금 준비하고 맘모스로 출발했다.
 
   L.A.는 비가 계속 오고 있고 5시 30분, 거리는 먹구름으로 어둡고 101 고속도로는 아주 천천히 북쪽으로 움직이는 주차장이다. 14번  긴 길을 빗속을 뚫고 간다. 395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비숍을 지나자 세차게 앞 창문을 때리던 빗방울의 모양이 달라진다. 결정체로 바뀌는 듯하더니 급기야 눈송이가 되어 눈앞으로 잡아먹을 듯 달려든다. 그 순간 나는 작은 심장을 할딱거리는 한마리 작은 종달새였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하얀 죽음의 산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직 수십 마일을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칠흑같이 캄캄하고 아무도 없다. 지나가는 차도 없다. 밤 11시 25분. 온도는 화씨 30도. 한국의 눈을 맞아보고 거의 20년 만에 보는 눈이다. "웬일이니? 내리는 눈을 보다니." 딸과 나는 충격적인 감동을 받고 흥분하며 눈 쌓인 산골을 통과한다. 길을 멀리 보려고 하이빔을 켜고 가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아주 큰 유조차가 누르는 크락션 소리에 얼마나 놀랐는지 긴 한숨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완전 공포 분위기를 만들며 휙 지나가는 차를 보내고는 "아마 끄라는 신호를 해 주는 것인가보다" 하고 하이빔을 내렸다. 아우성치며 잡아 먹을듯하던 눈이 아랫쪽으로 보이니 좀 조용하다. 너무 긴장해서 안개나 비, 눈이 올 때는 하이빔을 켜면 안 되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와이퍼도 얼어 가는지 큰 소리로 삐걱거리며 힘든 몸놀림을 한다. 이제 앞을 멀리 보지 못하니 속도를 더 줄여야 한다. 20마일 25마일 액셀러레이터에는 발을 대지도 못한다. 브레이크를 누르기도 겁난다. 차가 휙 돌아버릴까 무섭다. "아직 숙소까지 더 들어가야 하는데."
 
   동네에 들어오니 세워 놓은 차들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마치 백설기를 올려 놓은 것 같다. 우리가 가는 곳은 주차장이 건물 안에 있기를 바랐다. 새벽 12시 15분 Sierra Lodge에 도착했다. 와! 다행히도 차는 건물 안에 세울 수 있었다. 차 바퀴는 온통 하얀 붕대를 감은듯했다. 잠에서 깬 듯 안에서 나온 주인은 긴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어떻게 이 시간에 도착했느냐? 어디에서 왔느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이렇게 눈이 오는데 하룻밤만 묵을 거냐? 체인을 감아야 갈 수 있을 텐데" 하며 놀라워 한다. 염려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이층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여니 눈은 창턱까지 차올라 있고 맞은편 지붕에는 아주 긴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족히 2~3미터는 될 듯하다. 눈을 구경하기 원했던 딸과 나에게 눈이 오는 풍경도 함께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길고 하얀 길을 무사히 지나오게 해 주심도 감사했다. 눈이 슬슬 감기고 긴장이 풀어진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눈은  계속 내린다. 동네 눈을 치우는 트랙터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졌다.
 
   딸은 밤에 잠들지 못하고 인터넷을 뒤지며 아침에 가장 효율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알아본다. 바퀴에 체인 감는 일과 떼는 법도 공부한다. 아침 식사를 하며 옆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물으니 몇 시간 지나면 해가 있어 길이 좀 나아질 것이고 체인 없이도 살살 가면 될 것이라 한다. Free Way는 제설차가 다 치워 오히려 깨끗하다 한다. 안심이다. 주차는 Lodge에 종일 가능하다 했다. 이 눈 속에 차까지 끌고 다녀야 하는 염려는 안 해도 되었다. 
 
   Red Line Bus는 free로 종일 스키장을 왕복했다. 중무장한 스키어들로 꽉 찬 bus는 천천히 산으로 올라간다. 길 양쪽에는 구부러짐이 없이 올곧게 자란 나무들이 흰 눈을 가지마다 안고 있다. 큰 가지에는 큰 눈을, 작은 가지에는 작은 눈을 자존심으로 지키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미국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많이 보았던 그 풍경이 눈앞에 끝이 없이 펼쳐지는 길을 올라간다. 세상이 하얗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많은 눈은 보지 못했다. 산 위에 올라 곤돌라를 타고 9,000피트의 산 중턱에 올랐다. 온 산은 오르는 자들과 미끄러져 내리는 자들로 교차되었다. 하얀 세상을 보며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실제 느낌을 솔직하고 진실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독자들이 저렇게 순백의 글에 들어와 놀았으면 좋겠다. 산 위는 화씨 28도였고 눈이 쏟아져 곤돌라 정상 운행은 중턱에서 더 오르지 못하고 다시 돌려 내려갔다. 
 
   살살 조심해서 Free Way까지 오니 길은 깨끗하고 강한 햇볕은 여름이었다. 다시 비가 내린다. 하루를 겨울 나그네가 되어 사계를 보고 돌아왔다. 창조주의 전능하심이 비, 눈, 바람, 공기, 온도를 변화시킨다. 그 풍요로움으로 여행은 늘 가슴 뛰고 벅차다. 오늘도 찬 바람에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들의 참을성을 배운다. 아름다운 꿈속에서 깨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시간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그리운 L.A.의 유리창을 툭툭 건드리고 있다.
 
   이 글은 미주문학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