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숙의 문학서재






오늘:
1
어제:
12
전체:
320,264

이달의 작가

100세 시대의 취업

2018.12.24 10:24

조형숙 조회 수:13

   일본의 아주 작은 음악도시 다카라츠카에 간적이 있다. 작은 동네의 골목 골목이 얼마나 깔끔하고 예쁘던지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선물가게에는 아주 작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악기 마그넷이 온 벽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줄 하나까지도 똑같이 만들어져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꽤 여러개를 사왔다. 다카라츠카 사람들은 음악을 많이 사랑하고 매년 세계적인 합창 콩쿨을 개최한다. 우리 합창단도 초청을 받아 40개가 넘는 합창단들과 함께 연주했다. 

   연주후 다카라츠카의 유명한 여성 극단의 연극도 보았다.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연기자들인데 키가 크고 다 잘생긴데다가 남자 양복이 너무 잘 어울렸다. 또 노래는 얼마나 잘하는지 공연이 끝나고도 그 여운을 잃지 않으려 오랫동안 객석에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많은 커튼 콜을 받으며 인사하는 배우들에게 박수는 끝없이 계속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 학원에 바로 등록을 하고 일어공부를 시작했다. 식구들이 다 잠들고 난 후 거실은 내 공부방이 되었다. 거의 매일 밤 사전을 찾고 예습 복습하는 일로 보냈다. 피곤함도 잊었다. 창 밖으로 훤히 동이 터오면 남편 출근 준비와 두 아이 등교시키기 위한 분주함이 시작되었다. 젊어서 열정을 가지고 익힌 일어가 엉뚱하게 미국에 와서 인터뷰와 일에 유용하게 쓰일 줄은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했을 때 나이를 물었다. “60이 넘었습니다. 가능 할까요?" "목소리는 젊으신대요. 계속 일 하시던 분은 괜찮아요." 인터뷰 때 사장과 요시코는 상세하게 이것저것 질문했고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영어와 일어만 써야 합니다." "일어는 오래 전에 공부했지만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해 보겠습니다."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하겠다 하면 거의 취업이 안되는 것이 보통이다. 둘러본 가게는 깨끗하고 수 많은 물건으로 가득 차있고 내 성격과 맞을 것 같아 일하고 싶었다. 

  "함께 일하고 싶은데 오시겠습니까?"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다. 그리고 리틀 도쿄에서 일을 시작했다. 사장은 피부가 희고 깔끔한 인상이었고 눈매는 예민하고 날카롭다. 서두르지 말고 조용히, 천천히 매일 하나씩 배우라며 조금씩 가르친다. 어느 한 부분에 익숙치 않으면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수천 가지의 물건들이 사방 벽을 차지하고 있다. 나란히 놓여진 유리 선반에는 아주 조그만 인형들과 그릇이 진열되어 있다. 물건마다 가격이 붙어 있지만 짧은 시간에 외우기는 벅찰 것 같았다. 바람이 불러 들이는 미세먼지는 물건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 들어가 매일 닦아내야 한다. 혹시 그릇이 깨질까 조심한다. 기모노의 전통과 입는 방법, 오비(일본식 벨트) 묶는 법, 사이즈별로 정리하고, 물건을 보관해야 하는 자리 등 외워야 할일이 많다. "열심히 배워 보세요. 가능성이 없으면 안 가르칩니다. 알려줄 것이 너무 많은데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면 피차에 너무 힘이 드니까요." 내 가능성을 믿어주심에 감사하고 성실하게 배운다. 

   요시코는 또 다른 선생님이다. 청순하고 새침하다. 숏 커트에 단아한 얼굴로 차분하고 분명하게 말을 전달한다. 전에는 일본 여행객 상대로만 판매를 해서 아주 고가의 물건만 취급했다. 시절이 바뀌고 일본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졌고, 여러 나라 이민자들이 많아져 local location이 되면서 저렴한 물건도 판매하게 되었다. 직원도 일본인만 채용했는데 오래 일하던 일본인들은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국인을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성격이 강하고 자존심이 세서 잘 부딪치고 서로 상처받고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했다. 내가 왕년에는 이랬던 사람인데 그런말을 들어야해? 하는 자존심이다. 이제 레베카(내 미국 이름)를 만나 마음이 놓인다 한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긍정적으로 받아주고 협력해주니 많이 가르쳐 주고 싶다 한다.

   대화라는 것이 문법을 고려하지 않아도 그냥 공기처럼 흩어지는 단어들을 선택해서 나누는 것인데, 주어, 동사, 형용사 따지며 문법적 회화를 하려니 잘 안된다. 한 문장을 생각했다가도 틀리면 어쩌나 하는 순간적인 염려로 놓쳐 버린다. 상대방이 조금 미흡하면 영어 일어를 섞어 쓰면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가 완벽한 요시코 앞에서는 기가 죽어서 하고 싶던 말도 목구멍 저 밑으로 주욱 미끄럼을 타고 내려간다. 요시코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꼭 칠푼이 바보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기모노를 찾는 손님이 있으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판매의 기술을 배운다. 요시코는 기모노와 머리핀, 신발(게다)에 오비(허리띠)까지 구색 맞추어 손님을 흡족하게 한다. 단가가 크기 때문에 매상도 쑥 올라간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열심을 낸다. 선물가게는 깨끗함과 상냥함이 중요하지만 대화의 분명함도 필요하다. 미국에 오래 있으면 영어도 한국어도 잘 안된다고들 한다. 여러가지를 배우며 일어까지 훈련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지게 되어 매일 매일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