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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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바다 저 쪽 멀리 육지에 붙어 있는 산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해는 이제 막 산등성이를 넘을 준비를 한다. 경상남도 통영 사량도 섬에 만들어진 유선형 배 모양의 무대위에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우뚝 올려져있다. 왼 쪽 계단을 딛고 무대로 걸어 올라오는 중후한 모습의 남자는 놀랍게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였다. 길쭉한 키에 71년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멋진 신사의 모습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베토벤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주 편안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에는 주름이 가고  머리카락이 조금 휑하게 보이기는해도 세월을 아랑곳 하지 않는 그의 피아노는 끊임없이 건반위로 흐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작품 13번 <비창>의 1악장은 정열적이면서도 왠지 슬픈 느낌을 갖게한다. 해는 더 낮게 산을 넘어 가버리려고 자세를 낮춘다. 사방은 조용하고 오직 건반소리만 울려 퍼진다. 2악장의 기도하는 듯 아름다우며 느린 곡은 갈매기도 잠시 날개짓을 멈추게 한다. 3악장의 조금 빠르지만 서정적인 곡은 다시 애잔함으로 다가온다. 섬과 섬이 드문 드문 떠 있는 아늑한 바다 위로 멀리 떠 있는 배가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쇼팽의 <야상곡> 제 1번으로 곡이 바뀌었다. 쇼팽의 곡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곡의 하나로 아름답고 풍부한 정서를 담고 있다. 선율이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이유로 비판까지 받았다는 너무 아름다운 곡이다. 
파리 동남 쪽 뱅센느 숲 근처의 5층짜리 아파트에 28년째 살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여배우 윤정희의 아름답게 사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집에서는 매일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피아노 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주민이 없다 한다. 연주를 앞두고는 밤을 새워 연습을 하는데, 다음날 아침 문앞에는 꽃다발과 함께  "좋은 연주 잘 들었다"는 메모가 놓여 있다고 한다. 이웃 집의 아기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아랫 집 할머니는 6개월을 라디오를 끄고 피아노 소리를 즐기다가 하늘 나라로 가셨단다.
달이 몹시 밝은 밤이면 아내는 남편을 깨우고, 함박눈이 내리는 밤에는 딸과 함께 밤길을 걷는다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쇼팽의 음악은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쇼팽의 야샹곡이 부드럽게 섬 바위를 휘감아 울려퍼질 때, 해는 바다속으로 들어가버리고 고즈넉한 어둠이 내려 앉았다. 아주 잔잔한 실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살짝 살짝 건드려 날리게 하고 있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 중에서 <베네치아와 나폴리>를 연주한다. 리스트가 시끄러운 사교계를 떠나 아름다운 자연과 벗삼아 여행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창작했다는 곡이다. 리스트의 음악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다양한 음악적 구조의 테두리 안에서 여행의 일상을 기록한 일종의 음악 여행기라고 볼 수 있다. 1835년에서 1879년 사이 40년 이상이 걸려 완성한 곡이라고 한다. 여행중의 풍경과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시적인 정서나 낭만이 있는 전 4권 26곡의 피아노 소곡으로 되어 있다. 1곡 <곤돌라를 젓는 여인>과 2곡 <칸소네>를 들으면서 오래 전에 갔던 이태리 여행의 추억이 떠올랐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그리움 속으로 잠시 들어가 애절한 마음이 되었다.
 
   낙조가 아름다운 섬은 어둠으로 바뀌고 홀로 앉아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하다. 어두운 객석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손가락은 장마비 떨어지듯 건반을 내려치다가 경쾌하게 노래하다가 웅장하게 변한다. 새소리처럼 화사하게 재잘거리다가 또 다정하게 이어져 간다. 가끔은 꼭 다문 입이 움직이기도 한다. 음악이 흐르는 사이에 아주 어두워진 바다위로 불빛이 춤을 추며 은하수처럼 다가온다. 저 멀리 떠 있는 세 척의 배가 흘리는 불빛이다. 섬과 바다의 불빛, 어두움과 피아노 연주는 숨을 쉴 수 조차 없도록 아름다움을 준다.
연주 생활 61년의 그의 어깨에는 조금의 피곤함도 보이지 않는다. 자연과 음악이 잘 어울려져 긴 건반을 여행하다가 마지막 강한 두드림으로 오른 손이 위로 높이 튀어 오르며 리스트는 끝이난다. 긴 시간 동안 객석도 나도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리스트 특유의 화려한 음악에 황홀해 했다.
 
   연주는 나를 숙연하게 만들어 주고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다. 피아노의 거장이 살아가는 조촐하고 소박한 삶을 돌아보게 된다. 물질에 욕심이 없고 "화려한 것보다 들꽃 같은 삶"이 좋다는 아내의 말이 그들의 삶을 대변해 준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할까요? 추상세계, 정신세계에 사는 사람이 무엇이 그렇게 필요할까요?" 백건우의 고상하고 담백한 생각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은 자동차도 없다. 연주여행에는 주최측에서 차를 마련해주고 없으면 택시를 타고 다닌다. 파리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자동차도 없는 그들은 심플라이프를 살고 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남자와 음악을 좋아했던 여자가 만나 서로의 것을 사랑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황혼을 맞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그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10살 어린 나이에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 시작해 70이 넘은 나이에도 연습과 음악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을 하는 그를 세상은 <건반의 구도자>라고 부른다.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는 섬의 주민들을 위해 직접 먼 길을 찾아와 연주를 해준 백건우씨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거장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연주를 한 본인은 또 얼마나 행복한 마음일까?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일까?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재능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생각 할 수 있어 감사하다. 멀리 이 곳 미국에서도 통영 바닷가의 냄새를 느끼게 해준 연주에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 글은 미주문학 2018년여름호에 실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