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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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05.10 11:13

촛불잔치

조회 수 362 추천 수 2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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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잔치


                                                                                       이 월란




그의 집엔 층마다 방방마다 색색가지 초들이 수두룩하다
큰 것, 작은 것, 가는 것, 굵은 것, 둥근 것, 네모난 것, 별모양까지......
밥을 먹고나면 그는 매일 촛불을 켠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서......ㅅ.....
무지개 색으로 늘어선 파라핀들은 저마다 품은 추억의 색소로
그렁그렁 촛물을 이고, 그가 휙휙 지나가며 창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기억의 바람 앞에 노란 불꽃들이 꺼질 듯 잦아들기도,
몸을 녹여낸 비색(翡色)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하며

    
나쁜향과 좋은향을 철저히 가려서 태우기 시작한다
서양식 초의 활성탄은 김치의 분자간 구멍을 파고들기도
아로마의 향기분자는 마늘에 숯알갱이를 덮어 씌우기도 한다
코리언의 냄새입자들은 이 집안에서 제거되어야 할 역한냄새로 딱지가 붙어
그을음의 긴 꼬리 속에 가물가물 숨을 거두어야만 한다

    
초록색 초에 불을 당길 때 그는
이민 온 바로 다음 날 초록잔디가 깔린 고모네집 뒤곁에서
오줌을 갈기던 장면을 기억해내는지도 모른다
붉은색 초에 불을 놓을 때 그는
창문을 통해 그 장면을 보고 아연실색한 서양인 고모부가
뛰쳐나와 혁대로 어린 그의 등을 후려치던,
그래서 붉은 뱀처럼 꿈틀대던 등짝의 상처를 기억해내는지도 모른다
오리알같은 둥근초에 불을 붙일 땐
농구연습 후 통통 튀는 공을 놓쳐버리고 달려가던 그를 붙들고
<땀냄새가 고약하군, 황인종들이 마늘과 같은 종이란 사실은 꽤 흥미로워>
빈정대던 노랑머리 아이의 동그랗고 파랗던 눈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잠자리에 누운 그의 아내는 그가 내일 입을 속옷들을 주욱 늘어놓고
피식피식 는개같은 향수방울을 뿌려대는 소리에 늘 잠이 든다
결혼 전에도 그는 편지지마다 향수를 뿌려서 보내곤 하여
향수냄새에 취해서 열심히 해석을 하고 열심히 영작을 했었다
세 개의 냉장고엔 한국음식과 미국음식이 철저히 분리되어
서양인이 방문하는 날은 한국음식이 든 냉장고에 <NO TOUCH!!>란 사인이 붙고
엄동설한에도 그의 옷들은 한번씩 발코니에 나가 칼바람을 맞아야 들어올 수 있다
등푸른 생선이 그리운 그의 아내는 몇 점 먹겠다고 벼르다가도
푸른 제복을 입은 그가 개코처럼 영특해진 코를 벌렁거리며
놀던 물 잃은 생선처럼 날뛸 일이 버거워
마켓에서 집었던 생선을 도로 내려 놓는다
    

노스탤지어의 건더기들은 혀만 만족시킨 뒤 어금니로 꼭꼭 씹어
식도를 지나 배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흔적은 없애는 것이 좋다
오늘밤도 길들여진 불꽃들은 아른아른, 허공을 한식과 양식으로 분리하고 있고
어둠의 창마다 꽃이파리같은 이민자의 그림자가 불꽃따라 춤을 춘다
숨가쁜 증거인멸의 작업을, 지구를 돌아온 보름달이 몰래 알리바이를 기록하며
푸른 증인석에 빠꼼히 앉아 있다
  
                                                            
                                                                                         200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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