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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05.10 12:25

비상구

조회 수 257 추천 수 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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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이 월란




어설픈 사람이 지은 건물마다 모두 비상구가 있는데
완벽하신 신이 지으신 나의 몸은 어느 구석에 비상구를 숨기고 있을까
수마나 화마가 어느 순간 나를 덮친다면?
내가 연출 가능한 비상사태의 수위는?
정화수 속에 이물질같은 비극의 씨앗이 싹을 틔운다면?
말소되지 않을 전과를 지닌 독한 전범(戰犯)들은
총구를 조준하는 눈알같은 희망을 늘 꽤차고 있지만
도열한 위안부는 어디에도 기다리고 있지 않아
늙지 않는 심장을 가졌다는 파피루스에 새겨진
미라의 지문같은 전설도 이젠 믿을 수 없지
파파라치의 미행을 따돌리는 인기절정의 여배우처럼
비상구로 도망친 육신은 남루해지는 육신을 건사하려
또 다른 비상구가 필요한 건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온실 속의 화초도 질식하지 않을만큼의 바늘구멍같은 환기창을
비상구로 가지고 있지
비상사태가 오기를 은연 중에 기다리고 있는 저 맥쩍은 사람들
너의 평상시에 나의 비상시가 오면 강보에 싸여 칭얼대는 나의 꿈을 들쳐 업고
난 튼실한 저 현실의 벽을 뚫을거야
신의 쇠종소리가 거룩하게 부서져 내리는 저 첨탑 가까운 곳이든
욕기의 쓰레기가 매립되어 있는 저 오염된 지하수 가까운 곳이든
곪은 상처를 터뜨리는 피침으로 사각의 금을 긋고
붉은 정자로 새겨진 비상구의 사인을 붙일거야
오늘은 숨어 있던 비상구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출몰하다가도
내일은 비상구 천지이던 세상도 독특한 살내음 풍기는 방부제로 염을 한
밀봉된 훈제품처럼 우릴 가두고 말지
긴급한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평화시의 출구와 입구가 모두 비상구가 되지
자, 말장난은 이제 그만, 저 비상구의 위치나 제대로 봐 둬

                                                  
                                                                                  2008-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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