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92
어제:
232
전체:
5,033,237

이달의 작가
2008.05.10 12:33

나, 바람 좀 피우고 올께

조회 수 307 추천 수 1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 바람 좀 피우고 올께


                                                                                            이 월란




내 가슴 향해 조막손을 벌리던 꼬맹이 아들, 이제 다 커버려
내 머리 위에서 능글능글, 징글징글
밥숟가락 참새처럼 받아먹던 그 시절
집에 오면 한국말, 탁아소에선 영어
여물지도 못한 머리 굴려 겨우 말문이 트였을 때
큰 잘못 저지르고 회초리 든 엄마의 고함소리
<다신 안그러겠다고 대답해, 빨리 대답 안해?>
잔뜩 겁에 질린 두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 겨우 내뱉은 말
<흑흑흑 “대답” 흑흑흑흑>


눈 내리던 겨울 밤, 모자도 입고, 양말도 입고, 신발도 입고
부자(父子)가 나란히 나가던, 뒤뚱거리는 모국어의 오리걸음을 보며
한국어를 엉터리로 하면 귀여운데 영어를 엉터리로 하면 왜 무식하게만 보였을까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뼛속까지 파고든 문화적 사대주의의 잔재였을까


이방의 땅으로 분재되어 운명의 디아스포라가 된 이민 1세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고
1.5세들은 김치냄새 말끔히 씻어내고 혀를 잘 굴리는 것만이
원시적인 아이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출구였을 터
예민했던 목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붙었다 떨어졌다 했을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말 안쓰고 살다가 마누라 잘만나 일취월장 한국어 실력이 오른
신혼 초의 그 남자, 평강공주 앞에 선 바보온달처럼
냉정한 대화에 길들여진 사람과 성급한 분노에 먼저 길들여진 사람과의
자못 심각했던, 처음으로 치러낸 부부싸움 도중
타임아웃을 요구하며 심각한 모습으로 문을 나서며 했던 말
<나, 바람 좀 피우고 올께>


전쟁 다음 날 아침, 화해의 신선한 무드를 유지하려
꽤병을 부리며 하는 말
<나, 몸통 났어>
<몸통이 뭔데?>
<왜 있잖아--유식한 척하며--두통, 복통, 치통..........몸통 말야>


나의 과거를 둘이서 작당을 하고 훔쳐선
똑같이 갈라먹었는지 지금은 키도, 목소리도 똑같아져 버린
나의 모습이 동공 속에 늘 거꾸로 박혀 있는
합법적인 한 쌍의 사랑호운* 나의 도적떼

                                                                                      2008-03-15



* 사랑홉다 : ‘사랑옵다’의 원말, 사랑스럽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5 좋은 글 이월란 2008.05.09 295
204 죄짐바리 이월란 2008.05.17 290
203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은퇴예배 이월란 2008.05.10 313
202 주망(蛛網) 이월란 2008.05.09 349
201 주머니 속 돌멩이 이월란 2011.10.24 496
200 주머니 속의 죽음 이월란 2008.06.10 335
199 주정하는 새 이월란 2011.03.18 414
198 주중의 햇살 이월란 2010.04.23 330
197 주차위반 이월란 2010.02.28 442
196 죽어가는 전화 이월란 2009.10.01 307
195 죽어도 싸다 이월란 2010.05.25 366
194 줄긋기 이월란 2009.01.15 402
193 중간 화석 이월란 2011.09.09 313
192 중독 2 이월란 2010.07.09 532
191 중환자실 이월란 2011.12.14 430
190 즐거운 설거지 이월란 2011.05.31 367
189 증언 2 ---------구시대의 마지막 여인 이월란 2009.01.16 289
188 증언 3------구시대의 마지막 여인 이월란 2009.10.14 395
187 지구병원 이월란 2009.09.19 313
186 지그재그 지팡이 이월란 2009.01.02 271
Board Pagination Prev 1 ...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 52 Next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