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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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09.18 15:22

기억색

조회 수 309 추천 수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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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색*      


                                                                         이 월란  




앞마당 오른쪽에 서 있는 단풍나무, 8월 말부터 성급히 달아올라 온통 핏빛이다
드문드문 뒤쪽에 초록잎들이 보여 돌아가 보니 동향으로 뻗은 반신만 발갛다
반신이 불수인가 성급한 한쪽만 먼저 햇살에 익어버렸나


중3 가을소풍 날이었던가, 아버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셨고
엄마와 큰언닌 해가 지도록 마비된 아버지의 반신을 주물렀었다
뭔 조치를 치했는지 용케도 완쾌되신 아버진 해마다 눈밭에 두 발자국 선명히 찍으시며
돋보기 너머로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시곤 그 후 8년간을 건강히 지내시다 가셨다

  
그 날, 나의 반신은 소풍을 따라갔었고 반신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혹여라도 안방으로부터 곡소리라도 새어나올까 물방울을 헤아리며 몸이 굳어 있었다
아버지의 반신은 우릴 위해 계속 돈을 벌어 오실 것이며
나머지 반신은 우릴 가난이란 폭군 앞에 꿇어 앉힐 것이었으므로
반신은 성질 못된 막내딸에게 한번씩 고함을 지르시겠지만
나머지 반신은 침을 흘리시며 실룩거리실 것이었으므로


그 후에도 멀쩡히 걸어나가시는 아버지의 반신을 보며, 반듯이 걸어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보며 절망의 기억색은 경계도, 예고도 없이 마비를 일으키곤 했다
굉음을 삼키고 언제라도 송두리째 몸져 눕는 한뼘 세상이
우리를 속국처럼 거느린 아버지의 거대한 제국이었으므로


아버지의 반신은 농담처럼 재생되고 부활되었는데
나의 성적은 정확히 반에 반씩 몸져 누웠다
사과를 먹을 때조차 희망과 절망을 반반씩 베어무는 법을 알게 되었다
높아지고 있어도 반신은 추락하고 있어 다시 중심을 잡아야 했고
키가 자라고 있어도 반신은 땅 속으로 벌벌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튼튼한 한옥의 성벽은 밤마다 정확히 반쪽만 균열이 일었다


나의 반신은 유년의 희원을 과감히 삭제 당하고 대신 허무로 채워졌으며
허광의 피말강이로 정확히 반신만 붉은 생리를 시작했다
지금, 저 앞마당의 반쪽자리 단풍나무는 서둘러 폐경을 맞은 갱년기의 여자처럼
혈청이 부족하여 홍엽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떨어져 내릴지 모르겠다


반은 울고 반은 웃는 삐에로의 얼굴이 어쩌면 그리도 낯이 익던지
희극 속에 점점이 박힌 비극의 판토마임이 어찌 그리 고요한지
절망을 이식받은 사춘기의 가을은 그렇듯 반신만 화들짝 달아올라
충혈된 반신이 향방없이 접붙여진 나무가 되어 소슬소슬 가을이 되어 운다


                                                                      2008-09-18





* 기억색(記憶色) : ꃃ〖심리〗과거의 기억이 색깔의 체험에 영향을 주는 현상. 회색 종이를 나뭇잎
                           모양으로 오려 놓고 약한 불빛 아래에서 보면 녹색으로 보이는 일 따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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