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떠나는 풍경

by 이월란 posted Nov 2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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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떠나는 풍경



                                                                    이월란



창 밖의 풍경은 매일 떠나고 있다
계절에 충성하며 부르지 않아도 때맞춰
가벼이 날아앉은 것들이 가볍게도 누워 있다
정차한 밤기차처럼 차창 속에 까맣게 앉아있는 나는
음원이 사라진 이명이다


삶의 정본은 나인가, 저 풍경인가, 저 풍경을 건너간 사람들인가
나는 늘 한 폭의 풍경이 끝난 자리에 부록으로 앉아 있다
읽혀도 그만, 읽혀지지 않아도 그만인
참고해도 그만, 참고하지 않아도 그만인, 덤으로 온 별책부록
막이 내리고 난 후의 소음이다


나의 몸 밖에 있는 것들이 내 몸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오는 것이 삶인 줄 알았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내 속으로 조금씩 번져들어와
나도 그것들처럼 변색하는 것이 나이를 먹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의 몸 밖에 있는 것들에게서 제대로 나를 갈라
놓는 법을 익히는 것이 삶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서 물들지 않고도 연애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나이를 먹는 것이었다


눈뜨곤 못 볼 심야의 선정적인 화면처럼
꿈은 늘 장작 없이도 활활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손 내밀어 본 꿈자락에 손끝을 태우고, 가슴 귀퉁이를 태우면서
익명의 존재를 호명하기 위해 매일 시약이 발리지만
산과 알칼리의 중간 쯤에서 펄럭이며,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아직 한 문제도 답을 맞추지 못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휴가 없이 복무하는 세월의 파수병이 되어
갈빗대로 파오를 짓는 밤의 루트마다 상흔같은 별이 뜬다
걸어서 당도하는 폐가 한 채 바람을 견디고 있다
비가 되지도, 눈이 되지도 못한 진눈깨비들이
기억처럼 추적이는 지상의 뒤뜰
이쁜 애완의 짐승처럼 당신 무릎 위에서
낡아빠진 악기가 꿈꾸는 세도막의 녹턴처럼
잠들고 싶은 이 저녁에도

                                                                    200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