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84
어제:
231
전체:
5,025,737

이달의 작가
2009.01.15 12:27

줄긋기

조회 수 402 추천 수 2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줄긋기


                                                                       이월란

  


탯줄로 연명하고 탯줄 따라 딸려나온 나는 줄긋기를 좋아했다
줄이 보이면 잡고 싶었고 또 따라가고 싶었다
어릴 땐 교실 나무책상 중간을 칼로 휙 그었었고
운동장에선 맨땅을 긋고 또 그으며 땅따먹기에 정신을 팔았으며
한길에선 줄 따라 앙감질로 해가 푹푹 질 때까지 깨금집기를 했다
그렇게 분리를 일삼았고 경계를 즐겼다
줄은 칸을 만들고 네모진 칸들은 나를 가두었다
금 밟으면 쫓겨나는 열전의 유막, 벗어나거나 옮겨야만 했다
한 쪽 벽에 줄을 긋고 문을 내면 종종 밖에서 잠겨 있기도 했다
버릇처럼 줄을 긋고 나를 감는다
줄을 긋다보니 줄을 서는데도, 줄을 세우는데도 익숙해져 버렸다
줄은 수평선처럼 잔잔한데 내 몸은 출렁이며 어지럽다
결코 누군가를 향해 조준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마주서서 잡아당기는 줄은 팽팽한 칼날이 되어
나를 자르기도 한다
결코 눈금을 새기지도 말아야 한다
종이쪼가리나 전광판에 새겨진 무서운 숫자들은
종종 완전범죄의 모살자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모눈종이처럼 모눈이 많이 새겨진 칸들은
나를 해부하기 딱 좋은 수술칸이 되기도 했다
절개는 늘 출혈을 부른다
줄이 많고 그래서 칸도 많아진 원고지 위에서
칸마다 점점이 나를 흘려 두기 시작한 것도
이 줄긋기의 악습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허망한 세상의 줄들을 가늠하는 넓은 한 쪽 창틈에서
동네 아이 하나 줄을 비집고 나오고 있다
무심한 작대기를 땅에 질질 끌며 가고 있다
나는 또 익숙하게 딸려 간다

                                                              2009-01-15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5 늙어가기 이월란 2010.04.05 400
284 밤비 이월란 2010.05.30 400
283 길고양이 이월란 2009.12.03 401
282 VIP 이월란 2010.02.21 401
281 장사꾼 이월란 2010.03.05 401
280 마음 검색 이월란 2010.11.24 401
» 줄긋기 이월란 2009.01.15 402
278 슬픔의 궤 이월란 2009.06.01 402
277 애설(愛雪) 이월란 2009.10.17 402
276 쓰레기차 이월란 2010.12.14 402
275 엄만 집에 있어 이월란 2008.05.10 403
274 진짜 바람 이월란 2010.09.26 404
273 판토마임 이월란 2008.05.08 405
272 에움길 이월란 2008.05.09 405
271 The Tide 이월란 2010.04.05 405
270 영혼 받아쓰기 이월란 2009.09.12 406
269 눈꽃사랑 이월란 2008.05.08 406
268 차도르*를 쓴 여인 이월란 2008.05.09 406
267 처녀城 이월란 2009.08.06 406
266 털털교실 이월란 2010.02.21 406
Board Pagination Prev 1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 52 Next
/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