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 화방

by 이월란 posted Aug 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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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화방



이월란(09/08/05)



서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큰언니가 오는 주말이면 나는 괜스리 그림처럼 앉아있고 싶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간질이던 긴 생머리만큼 긴 인생이 그녀의 카키색 가죽부츠처럼 내 발에 맞지 않는 만질 수만 있는 신발 같을거라 여기곤 했던 것인데


그녀가 풀어놓은 헬로우키티 삼각자와 지우개가 잠시 품어도 좋은 꿈처럼 필통 속에 진열되고 나면 역전 앞 가방집 옆 셀로판지에 황금손처럼 싸여있던 복숭아맛 같기도 참외맛 같기도 했던 바나나 한 손이 그녀의 손에 들려져 <아버지 드릴거야> 냉장고 위에 얹혀질 때면 닿을 수 없이 허기지는 목숨의 높이가 거기쯤일거라 여기곤 했던 것인데


그녀가 화실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약국 옆에 마로니에 화방을 차렸을 때 <마로니에 화방>이란 거대한 간판이 옥상 위에 며칠간 내팽개쳐져 있었고 아버진 <화구일체>를 <화구일절>로 새기다니, 간판쟁이와 며칠째 언쟁을 벌이셨고 <마>자부터 <방>자까지 먼셀 표색계를 펼친 듯 점점 옅어지는 초록빛이 기억처럼 또 선명해지는 것인데


쯧쯧쯧 아버지의 혀차는 소리 이명처럼 들릴 때면 내 생의 그림을 완성할 화구들은 <일체> 진열되어 있는 것인지 <일절> 거두어가버린 것인지 썼다 지웠다 썼다 지우는 무식한 간판쟁이가 되고 마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