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시집

김칫독을 씻으며

by 이월란 posted Jun 0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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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칫독을 씻으며



                                                                이 월란



김치 다섯 포기가 들어 있던 항아리를 비웠다
두 손으로도 겨우 들었던 것을 한 손으로 휘휘 돌리며
피딱지처럼 말라 붙은 양념들을 말끔히 씻어 내었다
투명한 유리 항아리가 거대한 보석같다
씻겨진다는 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가벼워진다는 건 다 내려 놓았다는 것이고
비워진다는 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투명한 것을 씻을 때마다 묘한 희열을 맛본다
마지막 헹굼 단계에선 필요이상으로 속도가 느려진다
하찮은 노력으로 무엇인가가 맑아지고 투명해진다는 건
신선한 기쁨이다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은 사량(思量) 없는 얼굴에
번개같은 빛이 여기저기서 뛰어 들어온다
감금되어 있던 비릿한 넋이 소통을 시작하고
원시의 체온을 되찾아 완벽한 조율이 끝났다
험로를 헤치고 달려와 마침내 정박한 배의 맑은 창 같다
모노톤으로 만발한 유리꽃 사이로 운신하는 공기알
물꽃 세례를 받은 허공이 날을 세워 독안으로 들어온다
무엇이라도 베겠다, 무엇이라도 삼키겠다
비우고도 충만해지는 세공된 허공의 모순
기억의 생가를 허물고
응축된 生의 즙액이 만장 아래 흩어지는 날
매콤히 눈물지었던, 새콤히 가슴 시렸던 나의 몸도
씻겨지고, 비워지고, 가벼워 지는 날, 이리 투명해질까
다 비워내고도 충만해져 이리 눈부셔올까
서로를 다 파먹고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어
삭발한 고요 아래 적막히 앉아
극한의 가슴도 빈독처럼
무루(無漏)의 향기로 마저 여물까

                                                            200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