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196
어제:
265
전체:
5,022,450

이달의 작가
제2시집
2008.09.01 12:57

자해

조회 수 207 추천 수 1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자해(自害)


                                                                                                                이 월란



높은 곳에 서면, 절벽 위에 서면 난 무의식 중에 내 몸을 떠밀어 본다. 사금파리처럼 섬뜩하게 부서져 내리는 시간의 낭떠러지를 층층이 내려 앉는다. 무심코 발길에 채인 돌멩이처럼, 돌출해 있는 바위와 나뭇가지에 몸이 부딪치고 긁히면서 생의 말석을 향해 하강하는 길은 그리 길지 않다. 꽃같은 문신 붉게 새기며 뛰어내린 세월 속에서 사람들이 우우 몰려 왔다 우우 사라진다.

  
자살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순간의 취헐(就歇)은 난해한 시험문제를 포기해 버린 몽당연필처럼 추궁받을 가치조차 없겠다. 비명(非命)의 꿈을 그리는 것 조차 기울어져가는 나의 빈몸에겐 아직은 아름다운 재앙이겠다. 마흔을 넘기고나선 누구에게 버림 받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누구를 버린다는 것이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소슬한 길목들마다 슬쩍 돌아가보면 버린 눈물마저 파도를 짓고 있어 한번씩 목이 잠긴다. 이 잔인한 득도의 길은 내가 애초부터 무엇인가를 버릴 수 있을 만큼 철저히 소유할 수 없는, 그저 침몰하는 야거리 돛배였음을 스스로 익혀 가는 항로였겠다.


깊이가 1.6km 라는 그랜드캐년의 난간 없는 뷰포인트에서 유명시인과 함께 사진을 박겠다고 앉았다 섰다 그렇게 한 세상 찝쩍거려 보다가 나를 한번 더 떠밀어 보고서야 알겠다. 세상은 미움과 질투만을 가르쳤어도 배운 것은 사랑과 애착 뿐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매끌매끌 닳아가는 잔돌만한 죽음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난 하루에도 몇 십번씩 죽었다 깨어난다. 얼핏 설핏 고개내민 절애의 우듬지엔 혈색 좋은 야생화들이 아직 붉다. 등진 난간을 붙들었다. 다시 生이다.

                                                                                                               2008-09-01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7 제2시집 흔들리는집 / 서문 (오세영) file 이월란 2016.08.15 115
76 제2시집 흔들리는 집 / 표4글, 시인의 말 file 이월란 2016.08.15 164
75 제2시집 흔들리는 집 / 해설 (임헌영) file 이월란 2016.08.15 168
74 제2시집 흔들리는 집 3 이월란 2008.06.16 201
73 제2시집 노을 2 이월란 2008.06.26 204
72 제2시집 비손 이월란 2008.06.21 205
71 제2시집 가등 이월란 2008.05.10 206
» 제2시집 자해 이월란 2008.09.01 207
69 제2시집 통성기도 이월란 2008.05.10 212
68 제2시집 추월 이월란 2008.07.05 214
67 제2시집 분신 이월란 2008.08.13 217
66 제2시집 팥죽 이월란 2008.05.10 222
65 제2시집 외로움 벗기 이월란 2008.06.01 225
64 제2시집 사이클론 이월란 2008.05.10 226
63 제2시집 그리움의 제국 이월란 2008.06.17 227
62 제2시집 김칫독을 씻으며 이월란 2008.06.03 228
61 제2시집 동거 이월란 2008.08.12 235
60 제2시집 바다를 보고 온 사람 이월란 2008.05.10 236
59 제2시집 이월란 2008.08.09 236
58 제2시집 실종 이월란 2008.07.22 23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