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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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란 posted Dec 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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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란(2011-12)


한 번씩
분실 우려가 있거나 파기될 위험이 느껴질 때마다
서로를 복사한다
맞춤법 검사를 마치지 못한 입술과
공개되지 못한 파일로 잠긴 가슴과
서로를 뚫고 내쳐 달리던 네 다리를 포개어
서로의 저작권을 침해 한다
아래위로, 때론 좌우로 베껴 둔 디스켓들은
모기가 옮기는 뇌염처럼 전염되었을까
오래된 노비 문서처럼 말소되었을까
셋집 옮기듯 처소를 바꾸었을까
원본보다 좀 더 그럴듯하게 번역되었을까
소프트웨어처럼 충분히 업그레이드되기를
한 때 꿈꾸기도 했지만
감광막 위에 찍어 눌러 오랫동안 보존되기를 원하는
영상처럼 밤새 인화된 넋으로
사기 치듯 열리는 신비한 아침의 행각
팩시밀리처럼 전송된 서로의 암호는
토너 분말처럼 떠다니는 빛의 입자 사이로
필사된 영혼만 애달프다
임대 받은 전자기기처럼 소음이 늘어가도
A4 용지 가득 출력시킨 세월의 흔적은 읽을 수가 없어
해리성 기억상실에 걸려버린 이면지처럼
남아 있는 서로의 등
황금비의 규격으로 여전히, 눈부시게 남아 있는
저 여백을 뒤집으면
아무것도 내장되어 있지 않는
너와 나의 복제된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