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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문학성과 영성이 탁월하신 명설교자/김석규 목사편<중>

  오정방
  

  
5. 한국에서의 목회활동

김목사의 첫 목회는 1954년 4월에 부임한 서대전성결교회 였다. 그는
저서를 통해 이 시절을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서대전에서의 목회는 미숙한 점도 많았
지만 40여 년의 목회 중 가장 순수하고 열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지금도 그때의 신도들을 만나면 그때의 신앙생활이 무척 즐거웠다고
술회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소년 중에서
지금은 목사가 되어 목회를 잘하고 있는 분도 여러 명 됩니다”

목회자가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지도한 성도가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할만큼 발전하였다면 그 목회는 성공하였다고 보아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가 두 번째 목회를 한 교회는 서울의 충무성결교회이다. 미국에서
4년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모교인 서울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충무교회를 겸하여 섬기고 있었는데 그 무렵 충무교회의 교세가 확장
되고 목회업무가 다양화 되므로 전담목회자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1960년 5월 3일의 제123회 정기당회는 김목사를 전담목사로 정식 청빙
하게 되었고 김목사도
이를 수락하여 1974년 브라질로 떠나기 전까지 충무교회를 마음껏 섬기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예기치 않은 일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맸던 일인데 김목사는 이 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할 때는의례히 충무교회의 정다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주 충무교회에서 보내온 직원 사진첩을
꺼내어 보면서 기도를 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소천된 분들도
여러분이어서 서글픔과 함께 세월의 덧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사의 정이 큰 것은 내가 1973년 10월 고혈압으로 넘어
져서 사경을 헤멜 때 여러분들이 보여 준 진정한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서 심야기도와 철야기도를 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위독한 상태
에서 거의 완전히 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겸직으로 섬긴 1960년부터 기산하면 김목사 일생에서 완전히
중간토막인 40대를 전후하여 13년간 충무교회와 함께하고 1974년 6월
첫 이민 목회지인 브라질의 상파울로성결교회에 부임하기 위해 후임으로
최건호 목사를 청빙해 놓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6. 이민교회 사역과  교회개척

1954년 목사안수를 받은지 20년 째가 되는 1974년 6월, 충무성결교회를
후임 최건호 목사에게 위임하고 목장을 해외로까지 넓히는 첫부임지는
브라질이었고 거기서 상파울로성결교회를 맡아 시무하게 된다. 2년
4개월 동안  이 교회에서 섬기다가 다시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와 1976년 4월에 뉴욕한빛성결교회를 개척하였으나  그 해 11월 샌프란시스코 상항성결교회의 청빙을 받고 동부에서 서부로 자리를 옮겨 이 교회에서 근 3년간 목회를 하게된다.
그러던 중 또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따라 산호세제일성결교회를 개척하여 짧은 기간안에 급성장을 일으키며
이웃교회들의 부러움을 샀고 주목받는 목회를1989년 9월까지  근 10년간 혼신의 힘을 다 하게 된다. 그런 뒤에 교회를 신광철 목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엔 아직도 여력이 있다고 판단하시고 젊은 시절 유학을 왔을 때 정이 들었던 도시,  아름답고 살기 좋은 장미의 도시 오레곤 주 포틀랜드로 장막을 또 옮겨주셔서 1989년  9월, 다시 오레곤제일교회를 개척, 시무하게 된다.  1993년 9월까지 4년간 교회를 크게 부흥시겨 놓은 뒤 후임 최영학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은퇴생활을 하다가 1979년부터 장남 진국 목사가 시무하는 포틀랜드성결교회의 협동목사를 끝으로 앞만보고 마지막까지 잘 달려
가다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년수에 따라 2003년 1월 9일 오후 8시 15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가신 김석규 목사를 많은 후학들은 잊지 못한다. 오레곤지역에서 김목사와 함께 목회활동을 한 바 있고 오레곤선교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는 이보현 목사는 김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김석규 목사님은 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눈물도 많으시고요.
그리고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부드럽고 부정한 일에 대해선 단호한 분이셨습니다. 논리가 정연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정열적이신 분이지요. 특히 문학에 많이 심취하셨고 그것 때문에도
더욱 돋보이신 분이기도 합니다]라고.


*김목사가 개척하여 크게 일으킨 뒤에 제2대 목사로 취임하여 더윽 튼튼
하게 교회를 다진 산호세제일성결교회의 신광철 목사는 학생시절과
곁에서 보아 온 김목사를 이렇게 회상하였는데 두 분이 각별한 사이인 만큼 기억에 남는 것 또한 적지 않았다.

[김목사님은 뜨겁고도 부드러운 분이셨는데 한 번은 학생데모가 있어
사태가 심각했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는 설득에 학생들이
데모를 철회하여 사태가 잘 수습될 수 있었지요. 역시 부드러운 성격에
학생들이 큰 감동이 된 모양입니다.
이러한 성격이나 인품은 목회에도 잘 반영되어 열정적으로 목회를
하심은 물론 한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일하셨는데 가령 어떤 성도가 시험들어 교회를 떠나면 꼭 찾아가서 이해시키고 마음을 잘 다독여 주므로 다시 출석케하신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건강문제로 부득이 은퇴하시게 되자, “내가 한 5년만 더 젊다면”하고 아쉬운 마음을 표현할만큼 불타는가슴으로 목회에 정열을 태우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대설교가이신 것은 주지하시는 바와 같은데 지적이면서도 문학
적인 소양이 설교에 많이 나타나 청중에게 진한 감동을 줌은 물론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밑바탕에 강한 영력이 겸비되어 있었던 것은 재언할
필요조차 없지요.
김목사님께서는 가정을 몹시 소중히  여기심으로 오늘처럼 가정의
가치가 붕괴되는 어지러운시대에 본을 보이셨고 특히 사모님에 대한
애정은 남달리 각별하셨습니다.
김목사님은 회심한 후에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마치 사도바울처럼
살으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문학과 학문에 뜻을 두셨다가 어느날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하신 후 곧바로 모든 세상적인 명예와 영광을 버리고
주의 종으로 헌신하신 것은 오늘날처럼 목회적 사명보다 직업적이라고 지탄까지 받는 목회 현실에 귀감이 되는분이셨습니다.
어느날 같이 심방을 나가게 되었는데 잠간 기다리라고 하시며 “오늘
성경을 읽지 못해서 한 장만이라도 읽고나가려고 해요”라고 하시며
기다리게 한 기억도 납니다.
성격이 유순하고 부드러운 가운데서도 후배 교역자들이 잘못되었을
때는 무섭게 질책을 하여 바로 잡으시는 정의파 목사님이기도 하셨
습니다. 아무튼 김석규 목사님은 그 시대와 교단적 과제를 짊어지고 한평생 주를 섬기며 오직 한 길로만 걸어오셨습니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학교수로서 그는 부름 받은 이 길을 불타는 가슴을 안고 한결같이
매진해 오셨던 분입니다. 김목사님은 그의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짐을 지고서  묵묵히 예언자적 사명을 잘 수행하며 일생을 살아오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석규 목사가 오레곤제일교회를 개척할 때 집사의 직분으로 동참하였으며 개척 뒤에는 신학생의 신분으로 그 밑에서 학생전도사로 일하면서 남다른 사랑을 받았고 김목사가 졸업한  WES를 졸업한 동문이기도 하며 나중에 전도사의 자격으로 밴쿠버한인성결교회(현 온누리성결교회 전신)를 개척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뒤에 7년간 시무하다가 지금은 쌍파울로에 소재한 대한성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수명 목사는 김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김석규 목사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89년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오셔서 교회를 개척하실 때부터였습니다. 그 때 나는 미국 신학교를 다니면서 집사로 교회 일을 보았는데 김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1년쯤 후 김목사님이 “이집사님, 이제부터는 전도사로 일해 주세요  신학교도 다니고 하시니 집사보다는 전도사가 좋겠어요”하여 전도사 직을 받은 후 교회 목회하는 여러가지 일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 나의 목회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목사님께서 브라질에 잠간 계실 때 드셨던 마몽(빠빠야)이라는 과일을 잊지 못하시기에 우리
부부가 마켓에 들려 사다 드렸더니 반갑게 드시면서 브라질에서  먹던 맛이 안난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지금 내가 브라질에 와서 마몽을 먹을 때면 종종 김목사님 생각이 납니다.
김목사님이 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게 공부를 시키셨는지 그 때 배운 목사님들로부터 <호랑이 교수님>이라는 소리를 가끔 들었는데 나는 목사님 밑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꾸중이나 야단을 치시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내 아버님이 살아계셨더면  비슷한 연배이시라  그런지 사모님과 함께 늘 부모님같이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오히려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열심히 잘 보필해 드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조차 됩니다. 가끔씩 “이 전도사, 나는 이제 곧 물러날 사람인데 학교 졸업하면 이 교회를 맡아서 일하도록 해요” 하시면 나는“목사님 아닙니다. 저는 졸업하면 개척을 하겠습니다.  그 때 도와주시면 됩니다”
하면 못내 아쉬워 하셨지요. 후에 교회를 개척할  때 선교비를 보내
주셔서 개척교회에 큰도움이 되었지요. 무엇보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드님이 신학교에 들어 갔다고 하시면서 목사님 내외분이 그렇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아드님을 나는 적극 추천하여 포틀랜드성결교회에서 담임으로 청빙하게 했는데 지금 그 교회가 크게 성장하였다니 김목사님께 진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7. 성결교단을 이끌어 온 훌륭한 지도자

1950년 6, 25 한국동란으로 인한 사회혼란을 틈타 한국교회는
이단들이 활개치는 시대를 겪어야 했다. 소위 감람나무라고 자칭
하는 박태선 장로와 통일교 문선명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이 즈음에 한국성결교회는 교단분열의 진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기성과 예성의 분열이었다. 이 무렵에 기독교대한성결
교회는 신학적으로 훈련된 유학파 목사들의 귀국을 속속 맞게 되는데
그 중의 한 분이 바로 김목사이다.
김석규 목사는 많은 동문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신학교 교수로서 또한
목회자로서의 길을 잘 걸어 갔으며 자연히 성결교단에서도 주목을
받아 국내외에서 교단의 중요기관 단체장으로서의 그 직무도 잘
감당하게 된다.
1970년 3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서울동지빙회 지방회장을 지냈고,
1971년 3월부터 2년간 아세아성결교회연맹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1978년에는 북가주교회연합회 회장을, 1984년에는 산호세교회
연합회 회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1992년 5월부터 1년간은 마침내
기독교미주성결교회 총회장까지 역임하므로서 명실공히 성결교단을
이끌어 온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2005. 11. 1>

< 계속>


  
*출판기념회
    2005. 11. 17(목) 11시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에서




    ⊙ 발표일자 : 2005년11월   ⊙ 작품장르 : 전기
?
  • ?
    오정방 2015.08.25 06:04
    ◈ 꼬리말 쓰기





    이숙자 (2010-11-24 22:45:56)

    김석규목사님은 해방후 대전사범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재직 하셨고 1947년 예술제를 위해 연극을 지도 하신적도 있었습니다.충무교회에 시무하실때 한번 뵈었을 뿐 소식 몰라 궁금하여 찾아 보니 소천하셨다는 소식 너무도 안타깝습니다.옛날 제자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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