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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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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5 06:35

나희덕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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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주문학 2010 가을호,이 남자, 나희덕


이 남자


모니터 앞에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다 오더니
이 남자, 포르노만 진탕 보고 온 것인가 물이 올라 있다
나도 덩달아 물이 올라 기가 막힌 시상이 떠오르는데
손 뻗으면 머리맡에 메모첩과 펜이 놓여 있는데
이 몽둥이 같은 물건이 번데기로 진화라도 해 버린다면
이 남자, 날 가만 두지 않을 기세다
내 강아지에게 침을 뱉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겠다
낮에 쌓이는 건 밤에 풀리지만 밤에 쌓이는 건 낮에 풀리지
않는다는 신앙을 철저히 믿고 사는 이 남자
내가 풀 수 없는 너의 히스테리는 없어
어느 제목 아래 들어가야 하는 행간이더라
지금 받아 놓지 않으면 깡그리 잊어버리는 건 기정사실
사랑한다는 말은 세컨드 랭귀지로 하지마
가만, 바디 랭귀지가 먼저였나 한국말이 먼저였나
어디에라도 받아 적어 놓아야 한다
이 남자는 아직 나의 시를 단 한 개도 읽어보지 않았다
내 몸에 갈겨놓은 시들만 유독 잘 읽어낸다
데리고 살기엔 안성맞춤이다
난 길고 가는 것보다 짧고 굵은 인생이 더 좋아
그래야 오래 오래 아프지 않아
나의 집중력이 정교한 키스에 있다는 건 죽어서도 잊지마
스타카토 보다는 리타르단도가 좋아
클리토리스와 G스팟은 아르페지오로 연주해 줘
눈 속에 있는 악상기호를 제대로 읽어야 해
온음의 쉼표쯤은 오른쪽 귓불에다 찍어주고
갑자기 포르티시모로 날 놀래켜도 나쁘지 않아
그래, 거기, 거기에라도 써 둬야겠어
, 거기
쓰면 지우고 쓰면 지워버리는 이 남자
돈도 되지 않는 시 같은 건 뭐하러 쓰니
절정의 순간들을 매일밤 새겨 두고 자고 싶어
더 깊숙이 날 건드리면 포르노 작가가 되는 수가 있어
, 거기
,
등짝 가득 열 손톱으로 붉은 점자책을 만들어 버렸더니
쓰지 말랬잖아
나를 아예 엎어버리는, 이 남자

 

이월란의 이 남자는 상당히 긴 편이지만 언어의 긴장이 끝까지 유지되고 있다. 시인은 사랑의 행위와 시를 쓰는 행위를 겹쳐 놓으면서 양자의 의미를 설명적인 방식이 아니라 극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여성화자인 는 기가 막힌 시상을 떠올리고, ‘이 남자는 물이 올라 육체적 결합을 원하는 절묘한 상황은 대담한 시어와 구어체에 힘입어 생생하게 전달된다.

 

모니터 앞에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다 오더니
이 남자, 포르노만 진탕 보고 온 것인가 물이 올라 있다
나도 덩달아 물이 올라 기가 막힌 시상이 떠오르는데
손 뻗으면 머리맡에 메모첩과 펜이 놓여 있는데
이 몽둥이 같은 물건이 번데기로 진화라도 해 버린다면
이 남자, 날 가만 두지 않을 기세다
내 강아지에게 침을 뱉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겠다
낮에 쌓이는 건 밤에 풀리지만 밤에 쌓이는 건 낮에 풀리지
않는다는 신앙을 철저히 믿고 사는 이 남자
내가 풀 수 없는 너의 히스테리는 없어
어느 제목 아래 들어가야 하는 행간이더라
지금 받아 놓지 않으면 깡그리 잊어버리는 건 기정사실
사랑한다는 말은 세컨드 랭귀지로 하지마
가만, 바디 랭귀지가 먼저였나 한국말이 먼저였나
어디에라도 받아 적어 놓아야 한다
이 남자는 아직 나의 시를 단 한 개도 읽어보지 않았다
내 몸에 갈겨놓은 시들만 유독 잘 읽어낸다
(중략)
그래, 거기, 거기에라도 써 둬야겠어
, 거기
쓰면 지우고 쓰면 지워버리는 이 남자
돈도 되지 않는 시 같은 건 뭐하러 쓰니
절정의 순간들을 매일밤 새겨 두고 자고 싶어
더 깊숙이 날 건드리면 포르노 작가가 되는 수가 있어
, 거기
,
등짝 가득 열 손톱으로 붉은 점자책을 만들어 버렸더니
쓰지 말랬잖아
나를 아예 엎어버리는, 이 남자

-이월란,이 남자부분



사랑의 행위를 하는 동안에도 는 계속 몸에 시를 쓰고 이 남자는 그 시를 계속 지운다. 이때 쓰다라는 동사와 지우다라는 동사가 만나는 전쟁터가 된다. “돈도 되지 않는 시 같은 건 뭐 하러 쓰니라든가 쓰지 말랬잖아등 남자의 말에서는 시쓰기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에게 시쓰기는 절정의 순간들을 매일 밤 새겨두는 일이며, “사랑한다는 말은 세컨드 랭귀지로 하지 마라는 주문처럼 한국어(모국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 화자인 에게 시와 사랑, 말과 몸은 대립적인 것도,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유비관계가 다양한 변주를 이루면서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사랑과 그리움을 우리는 흔히 추상적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기금까지 읽은 시들을 통해 그 감정이나 관념들이 몸의 물리적 감각들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위장이 기억해낸 감정, 밥통에 코를 쳐 박을 때의 감정, 머리카락의 이탈이 빚어낸 감정, 물이 오른 육체가 유발하는 감정 등은 모두 몸에서 읽어낸 것이며, 몸이 읽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표현은 몸이 또 다른 몸 위에 쓰는 살아 있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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