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결혼 수정 연재 1
2012.07.08 06:05
아 버 지 의 결 혼
제 1 회
아버지의 성화가 부쩍 더 심해졌다.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이라 좀 있으면 잠잠해지겠지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더는 끌 수가 없으니 이제는 무슨 결판을 내야겠다는 것이다. 결판이란 이혼을 의미한다. 90을 눈앞에 둔 나이에 이혼이라니··· ···.
눈만 마주치면 이혼 타령이라 슬슬 피하기도 해봤으나 계속 그럴 수도 없었다. 남편은 신문에 날 일이라고 허허 웃으며 망령기가 발동한 탓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대수롭잖게 말을 하지만 정미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아버지는 앉기만 하면 “그게 눈만 뜨면 나가 싸돌아다닌다고. 시민권 공부한답시고 핑계를 대지만 어디 젊은 놈하고 눈이 맞았는지 알아?” 하고 역정을 냈다.
70 노인이라도 아버지 눈에는 젊은 놈이다. 정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수차 말했으나 그가 한 번 정해 놓은 마음은 바늘 끝조차도 들어갈 틈이 없었다. 변호사한테 가서 물어보았더니 6개월 별거하면 자동 이혼이 되나, 지금 와서 그 여자를 쫓아낼 수는 없으니 아버지보고 집을 나오라고 했다 한다.
그가 집을 나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만일 이혼이 가능하면 그는 누구하고 살아야 하나? 천생 두 아들밖에 없다. 그러나 두 아들이 순순히 아버지를 받아줄까? 역시 노인이 된 남편과 함께 원 베드룸 아파트에 사는 정미는 도저히 아버지를 모실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 정미는 아버지와 아래 위층에 살고 있으니 더 그렇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바로, 아버지를 위해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왔으나 요즘은 차라리 멀리 사는 것이 더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신청을 하고도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정미는 운이 좋았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 가, 한국 타운 중심부에 있는 이 노인 아파트는 깨끗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편리해 좋기만 한데 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정미는 지금 속을 썩고 있는 것이다.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이 있었다.
“ 내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아버지 수발 다 들어주고 있으니 오빠들이 주는 용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 잡숫고 살았으면 되는 건데, 왜 재혼은 해 가지고 그래요?”
아버지는 5년 전에 재혼을 했다. 그때 나이가 여든 둘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몇 달도 채 안 됐는데 이 여자 저 여자와 만나는 것을 눈치 챈 정미는 서운하기도 했지만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이해를 했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정미는 아버지가 재혼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안 했다. 소문을 들으니 아버지가 여자를 고른다는 것이었다. 70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60 안팎에서 고른다고 했다. 6, 70대에서도 재혼을 원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정미에게는 놀라웠다. 나이가 그렇게 많은데도 여자들이 줄줄이 서 있고 심지어는 50대 여자도 있다고 해 더더욱 놀랐다.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딴 세상 같았다.
옆집 여자는 어디서 들었는지 쉰두 살짜리도 있는데 너무 젊어 아버지가 싫다고 했다며 수다를 떨었다. 쉰둘이면 정미보다도 한참이나 아래인데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물려줄 재산도 없다. 어떤 여자들이 그렇게 줄줄이 서 있는지 궁금했다.
“영주권 때문에 그러지. 자식들한테 의지 안 해도 노후가 보장되니까 방문으로 왔다가 무작정 눌러앉아 영주권 받으려고 다들 야단이라고. 노인들 재혼하는 거, 요즘은 하나도 흉 아냐. 세상물정에 왜 그리 어두워? 지금이 뭐 이조시대인 줄 알아?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혼자만 순진한 척 내숭 떠는 거야?”
흉을 본 것이 아니라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도 그녀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얼굴을 구겼다. 정미의 아래위를 훑어보는 눈빛이 아주 기분 나빴다.
“더구나 할아버지는 굉장히 건강하시고 또 멋쟁이잖아? 모든 면에 박식하고 유머도 있고 말씀도 잘하시니까 여자들이 따르기 마련 아니겠어? 지난번에 보니까 쌀 두 포대를 양손에 들고 끄떡없이 걸어가 누군가 했더니 바로 할아버지더라고. 뒷모습이 어찌나 꼿꼿한지 꼭 청년 같더라니까.”
옆집 여자는 자기가 아버지한테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침까지 튀겨가며 열을 올렸다. 청년 같다는 그녀의 말에는 과장이 심했으나 어쨌든 아버지의 건강은 과히 놀라울 정도다. 돋보기 없이는 신문도 못 보는 정미에 비해 그는 아직도 맨눈으로 신문을 줄줄 읽으니 하늘이 내린 건강을 타고난 특수 체질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 번은 병원에 갔다가 벽에 붙은 시력검사표를 괜히 줄줄 읽은 적이 있다. 곁에 있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 “어마나, 군대 가셔야 되겠어요.” 하고 농담을 던져 다들 웃었다.
정미는 아버지 연세가 지금 몇인데 결혼을 하겠느냐고, 절대 결혼 같은 것은 안 할 것이라고 그녀의 말을 막았다. 돌아서는 정미의 뒤통수에다 대고 옆집 여자는 목청을 높였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마음은 젊은 사람하고 똑같다니까. 자식이 돼 갖고 어찌 그리 부모 마음을 몰라? 지난번에 회장 얘기 듣고서도 그러네. 그 광고지 당신도 봤잖아.”
8층짜리 이 노인 아파트에는 워낙에 한국 사람이 많아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도 열리고 회장, 부회장 등 간부도 있다. 그 회장이라는 여자가 좀 말이 많은 편이라 자기 오빠 얘기를 떠벌리고 다녀 그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녀의 오빠는 아내가 죽은 지 겨우 한 달 지났는데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프린트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광고지 돌리듯 건네준다는 것이다. 정미 같으면 쉬쉬하겠건만 회장은 오빠한테 무슨 억한 심정이 있는지 광고지를 온 아파트 사람들에게 돌렸다. 물론 정미도 보았다. 그래도 그녀의 오빠는 아버지보다 10년이나 젊은 나이였다.
나이 72세, 키 170, 학력 예일대 졸업, 재산 백만장자, 그리고 한 달 고정 수입에다 또 쌓아놓은 연금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사진도 나와 있었는데 아주 허여멀건 하게 잘생겼었다. 거기에다 전 부인이라는 타이틀 아래 ‘이 아무개’ 하고 이름까지 적혀 있어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그녀가 한국 사회에서는 좀 유명한 여자여서 정미도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줄리아드 음대를 나온 피아니스트였다. 회장이나 그 오빠나 그 집안에는 치매기가 빨리 오나 하고 정미는 한참을 어리둥절했었다.
배우자 자격은 나이는 55세 이하여야 하고, 학력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야 하며, 키 160 이상으로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야 한다고 못을 박아 놓았었다. 광고지를 받은 주위의 친한 사람들이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충고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지금은 너무 이르니 조금만 참으세요.”
한데, 아버지라는 사람의 말이 걸작이었다. 내지르는 목청이 하늘을 찔렀다.
“뭐 조금만 참아? 얼마나? 1년? 2년? 난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이야. 하루가 급하다고. 네가 내 생각을 조금만 해도 아버지 등 떠밀며 ’빨리 결혼하세요.’ 그래야지. 뭐 너무 이르다고? 이 불효막씸한 놈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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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2012-07-08 16:56:43)
죽는 날까지 인간은 나이에 상과없이 같은 마믕으로 살다 갈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몸이 늙는거야 어쩔 수 없지만, 마음마저 늙는다면 그거야 말로 형벌일 것 같은데요. 소설 속에서나 현실 속에서나 언제나 마음은 이팔청춘에 머물 수 있음이 신비롭기까지 하군요.
김영강 (2012-07-08 16:57:35)
정말 그렇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이팔창춘에 머물 수 있음"은 참 신비롭습니다. "너의 젊음이 네가 노력해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해서 받은 벌이 아니다." 시인 로스케의 말이던가요? 어느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랬습니다. 마음이 몸과 비례해서 늙어가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신비롭게 살 수 있으니까요.
빛과 그림자 (2012-07-08 16:58:24)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은교>에서 노시인이 하시는 말씀인가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늙음도 내 잘못으로 해서 받은 벌은 아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암시하는 말이네요.
김영강 (2012-07-08 16:59:23)
맞습니다. 영화 <은교>에서 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저 역시 한참을 생각했고, 또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젊음과 늙음을, 절대로 상과 벌로 가름할 수 없지만 만일 그렇게 가정을 한다면 맞는 말입니다.
강기영 (2012-07-08 17:00:14)
잘 읽었습니다.
저는, 소설은 어느 형태로든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잘 읽혀져야 한다는 쪽인데 <아버지의 결혼>은 시작부터 잘 읽혀졌습니다. 일단은 성공하는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저도 노년 문제를 다루는 장편을 하나 쓰고 있는 중이어서 다음 회가 더욱 기다려 집니다. 답글 |
김영강 (2012-07-08 17:01:20)
잘 읽혀진다 하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조금은 안도의 숨이 쉬어집니다. 다음 회도 또 다음 회도 꼬박꼬박 읽어주실 줄 믿습니다.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한 마음이랍니다. 노년 문제를 다루는 장편, 언제쯤 발표가 될는지 기다려집니다.
석천 이상묵 (2012-07-08 17:06:01)
감사합니다. 캐나다 문협 카페는 한국으로 치면 중강진쯤 되는 변방인데 도성에 사는 규수가 연서를 보내준 듯 설레입니다.국경에 상관없이 문학은 인간의 문제를 파 헤치는 것이니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듯 합니다.
지금은 매체의 분산으로 소량다매의 시대가 된 만큼 캐나다 독자의 수 보다 질에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바랍니다.
LA 처럼 여긴 소설 쓰는 분이 많지 않은데 다행히 프로 급인 강기영씨가 있어 정중히 응대하리라고 믿습니다.
저희 문협도 고령화를 앞에 두고 있으며 젊은 후속 세대가 없어 아쉬운 판국입니다.고령화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을 올려 주시고 부족한 카페에 힘을 실어 주심을 거듭 감사 드립니다.
김영강 (2012-07-08 17:06:55)
석천 선생님,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이렇게 카페를 관리하시면서 후배 문인들을 위해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곳 LA도 소설 쓰는 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역시 고령화를 앞이 두고 있으며 젊은 후속 세대가 드뭅니다. 여기서는 달샘 선생님께서 후배들을 챙기며 잘 감싸주고 있지요. 저는 제 글을 또 한 곳에 발표할 수 있는 텃밭이 생겨 기쁩니다.
물방울 (2012-07-08 17:07:45)
김영강 선생님 이 곳에서 뵈옵네요.
선생님 소설 기다리며 읽던 때가 생각납니다. 댓글도 너무 재밌었던 기억도요.남은 생을 위하여 자신을 알리고 열심 배우자를 구하는 여러 아버님들이 등장 하시네요. 다음 회가 벌써 궁금합니다.
김영강 (2012-07-08 17:08:46)
그랬었지요. 댓글들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멀리 사는 제 친구 하나는 "물방울은 누구고, 또 달샘은? solo는? nicos는?" 하면서 소설도 소설이지만 댓글들 읽는 맛이 쏠쏠 너무너무 맛있다고 그랬답니다. <아버지의 결혼> 역시 이렇게 댓글들이 달리니 격려가 되고 신바람이 납니다. 물방울 님, 고마워요.
달샘 (2012-07-08 17:09:21)
늘 마음이며, 작품을 나누는 친구이자 동생.^^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슬슬 웃음이 납니다.
80 이 넘어도 자기는 '청춘'이라고, 바람을 끝없이 피우시던 우리 시아버님이 생각나네요. 담 회를 기다리며~~~
김영강 (2012-07-08 17:10:07)
"80이 넘어도 자기는 청춘"···. 청춘은 신비로워서 멋진데, 끝없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영 멋지지가 않네요. 남자들은 차암·· ···. 남자들이여, 오해는 마시옵소서. 남자들을 몽땅 지칭하는 말은 아니옵니다. 2회에서 80이 넘어도 계산상으로는 이팔청춘이라는 답이 나온다는 구절이 있는데, 달샘 선생님이랑 빛과 그림자님께서 미리 맞춰버렸어요. 달샘 선생님 말씀대로 마음과 작품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저는 행운아입니다.
원허 정봉희 (2012-07-08 17:10:52)
늙음은 물리적 현상,즉 신체적 늙음일 뿐,정신적인 쇠락함과는 무관한 일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요즘 트렌드에 아주 잘 어울리는 소설이 흥미롭습니다.누구도 부정적인 사안으로 치부해선 안 될 문제라 여깁니다.
재미있는 전개에 슬슬 눈길을 흘리고 따라 갑니다.다음회가 기대됩니다.
김영강 (2012-07-08 17: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