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와서 처음 다녔던 한국교회는 옆 동네 교회 목사님이 출장오셔서 예배를 인도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부흥회에 우리 교회 성가대가 우정 출연하게 되었다. 성가대 찬양 순서가 끝나고 자리에 들어가려는데 한 낯선 분이 다가오더니 밖에 나를 안다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가보라고 했다.
미국땅에 나를 아는 사람? 갸웃해하며 나갔더니 어둠 속에서 함박웃음을 머금은 한 여자가 다가오며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로 '혀이 엄마 맞제? 미국 간다 카드만 여 왔나? 하이고마'하는데 그제야 한국 살 때 한 아파트 단지에 살던 미래 엄마인 것을 알고 너무 반가워 껴안고 빙빙 돌며 요란을 피워댔다.
우리처럼 주재원 가족으로 미국 온 미래네, 한국에서 서로 좋은 감정으로 지내다가 아쉽게 헤어진 탓인지 뜻밖의 만남이 행운처럼 여겨졌다. 몇 년 후 두 가족 모두 조금 큰 도시로 나와 한 동네, 걸어서 다다를 수 있는 곳에 살며 알콩달콩 정을 쌓다가 미래네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집에 다른 주재원 가족이 이사를 왔다.
얼마 후 우리 가족은 남편 직장 따라 영국으로 갔는데, 한국에서 오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유럽 여행길에 오른 적이 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이탈리아 관광 안내원은 한국 여권은 비싼 값에 거래되기 때문에 노리는 사람이 많다며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집시여인을 주의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로마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고대 로마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를 향하여 걸어가던 중이었다. 일행 중 한 남자가 갑자기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당시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전문가용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녀 눈에 띄던 그 남자, 방금 내 곁을 뛰어 지나간 두 여자를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그 여자들이 바로 '집시 여인'이라는 것이다. 한 여자의 손이 여권이 들어있는 자기 바지 주머니 안쪽까지 들어왔을 때야 알아채고 엉겁결에 고함을 지르며 여자의 손을 떨쳤다는 아찔한 경험담이 일행들에게 은근한 스릴감까지 제공해 주었다.
몇 달 후 서울 사는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로마에서 집시 여인에게 당할 뻔한 남자 있었지?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놀라서 물었더니 그 남자가 언니 친구 남편이고 애들끼리도 절친한 사이고, 어쩌고 저쩌고, 그 집의 이력을 줄줄 꿴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친구 부부의 여행담과 어떤 남자가 로마에서 큰일 날 뻔 했잖냐 하던 친정엄마 말이 비슷해서 알아봤더니 모두 일행이었다는 그런 얘기다. '좁은 세상' 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여행 다녀온 지 16년이 흘렀지만, 언니는 로마의 인연이 끝이 아닌 듯 그 집 근황을 수시로 알려주고 나는 귀를 세우고 듣는다. 얼마 전에는 가까운 이웃이 자기 아들이 사귀는 여자가 있다며 데리고 왔는데 미래네 집에 이사 온 다른 주재원 가정, 그 집 딸이다.
까맣게 잊혀진 인연이 다시 이어진다. 친근한 얼굴이 떠오를 때 나는 가끔, 이 사람을 어디서 만났더라 인연의 시작을 찾느라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잘 헤어진 인연들로 인해 추억은 빛이 난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