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나는 친구 개념이 조금 다르다. '가깝게 사귀고 있는 비슷한 연배'를 친구라고 하는 나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을 통틀어 친구라고 하는 것 같다. '친구가 와 있거든' 해서 '어떤 친구?' 하고 물었더니 운동하다가 만난 아빠 나이의 미국 아저씨라고 해서 킥킥 웃었던 적이 있다.
각별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기호를 가진 모임 혹은 단체의 사람을 뭉뚱그려 '친구'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부대껴서 깊어진 사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만 동료 의식이 느껴져서 그런 대로 괜찮다.
미국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처럼 친구의 범위는 넓어지는데 만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마음을 온전히 터도 좋은 두터운 사귐에 대한 갈망은 더해지는 것 같다. 아무튼 미국식이든 한국식이든 친구는 우리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만남의 횟수가 잦아지면 우리 안과 밖의 모습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언어와 정서 차이로 한계를 넘지 못하는 외국 친구는 일단 제쳐놓고, 미국 사는 동안 나를 변화시킨 친구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본다. 첫째 문학 관련 친구들과의 만남이다. 서로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는 인연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글 쓰는 사람 특유의 예민한 촉수에 신선한 도전을 받는다. 고독한 수고 뒤의 뿌듯한 즐거움을 공유하는 소중한 만남이다.
둘째는 '좋으신 하나님' 을 간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중증 예수쟁이들과의 만남이다. 교회 다닌 햇수에 비해 신앙심이 그리 깊지 못한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 문화가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발견한다. 삶의 가치관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영원한 것과 유한한 것의 결국에 대한 생각에 이를 때면 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그 다음은 외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친구들과의 만남이다. 시종일관 외적인 것을 주제로 삼을 때면 사람이 좀 가볍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현실적이고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유쾌한 만남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최신 스타일을 지향하는 이들은 유행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주위에 전파하는데 일조한다. 내로라하는 명품으로 둘둘 감은 모습은 왠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가꾸는 즐거움을 일깨워 줘서 좋다.
교회 밖이라 하더라도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 같다. 외모에 각별한 관심을 쏟는다 하여 외모로만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혹, 문학에 목숨을 거는 친구가 있다 해도 내것이 최고라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소통하고 배우고 성장해 나가는 한편, 성향이 다른 부류와의 만남은 어느 한 곳으로 심하게 쏠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다. 갈 길이 아직도 까마득하지만, 그나마 이만치라도 자란 것은 친구들 덕분이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많은데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시작하는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떠올리며 아련한 그리움 속으로 빠져든다. 저녁에 우리 집 앞을 지나다가 나와 함께 차 한잔 하고 싶었는데 '여긴 미국인데 싶어' 발길을 돌렸다는 친구의 고백에 마음이 짠하다. 예고 없는 저녁 방문을 선뜻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꿈은 여전하다.
미주 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3.23